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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206

반성 21 / 김영승 반성 21 김영승 (1959 ~ ) 친구들이 나한테 모두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폐인이라고 규영이가 말했다. 너는 바보가 되었다고 준행이가 말했다. 네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고 현이가 말했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승기가 말했다. 모두들 한 일년 술을 끊으면 혹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술 먹자, 눈 온다, 삼용이가 말했다. - 시집 알려진 대로 김영승 시인은 1980년대 현실을 특유의 해학으로 극복한 , 연시적 분위기를 저변에 깔고서 가혹하게 자아를 성찰하며 세상사의 이면을 뒤집어 보고 있는 , 풍자와 야유의 방법으로 세상의 허위와 기만에 대응하는 (1989), 슬픔의 정조를 지닌 독설과 자학으로 권태에 대한 공격과 그 공격 자체에 대한 권태를 그려낸 등의 시집에 실린 그의 시는.. 2012. 8. 13.
그물 낚시 잊어 두고 / 윤선도 심사정(1707(숙종 33)∼1769(영조 45))의 그림 선유도 그물 낚시 잊어 두고 윤선도(尹善道 : 1587 ~ 1671) 그물 낚시 잊어 두고 뱃전을 두드린다. 앞개를 건너고자 몇 번이나 헤어본고. 무단(無端)한 된바람이 행여 아니 불어올까.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夫.. 2012. 8. 6.
바다의 층계 / 조향 바다의 층계 조향(1917 ~ 1985)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對話)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뽄다리아〉 <마주르카〉 <디젤 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受話器) 여인(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2012. 7. 30.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프란츠 카프카 오규원(1941~2007) -MENU-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위의 시를 다음과 같이 순 우리식으로 바꾸어 쓰면 어떨까요? 제목 : 이상(李箱 김해경) -차림표- 김소월 800원 기형도 800원 이 상 800원 임 화 1000원 심상대 1000원 김태길 1200원 조 향 1200원 최재천 1200원 김용옥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李箱 또는 김해경 시인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2012. 7. 23.
새벽부터 내리는 비 / 김승강 새벽부터 내리는 비 김승강(1959~ ) 비야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누이의 발길을 돌려놓아라 새벽에 꿈결에 깨어 어 비가 오네 하고 미소 지으며 달콤한 잠 속에 빠지게 해라 비야 노동판을 전전하는 김 씨를 공치게 해라 무더운 여름 맨몸으로 햇빛과 맞서는 김 씨를 그 핑계로 하루 쉬게 해라 비야 내 단골집 철자의 가슴속에서도 내려라 아무도 모르게 가슴속에 꽁꽁 감추어둔 철자의 첫사랑을 데려다 주어라 비야 내려라 내려도 온종일 내려 세상 모든 애인들이 집에서 감자를 삶아 먹게 해라 비야 기왕에 왔으니 한 사흘은 가지 마라 그동안 세상 모든 짐은 달팽이가 져도 충분하게 해라. 시인은 비가 많이 와서 쉴 사람은 좀 쉬게 해달라고 하늘에다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일만 하고 .. 2012. 7. 1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 마종기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마종기 (1939 ~ ) 1. 옥저의 삼베 중학교 국사시간(國史時間)에 동해변(東海邊) 함경도 땅, 옥저(沃沮)라는 작은 나라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발 꿈에 나는 옛날 옥저 사람들 사이에 끼여 조랑말을 타고 좁은 산길을 정처 없이 가고 있었습니다. 조랑말 뒷등에는 삼베를 조금 말아 걸고 건들건들 고구려(高句麗)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삼베 장수가 된 것이 억울해 마음을 태웠지만 벌써 때 늦었다고 포기한 채 씀바귀 꽃이 지천으로 핀 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딴 나라의 큰 마을에 당도하고 금빛 요란한 성문이 열렸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지금은 잊었지만, 나는 그때부터 이곳에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옥저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도 .. 2012. 7. 9.
서정의 장소 / 장이지 서정의 장소 장이지(1976~ ) 그것은 수구초심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껑더리된 늙은 여우가 짓무른 눈으로 가시밭길을 더듬어 난 곳을 찾아가는 것은 향수 그 이상의 마음입니다. 어미의 털이, 형제의 털이 아직 남아있는 굴, 시르죽은 여우가 거기서 몸을 말고 누워 죽는 것은, 깨어나지 않는 것은 그곳이 태아의 잠으로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몰라서 천지간에 살아보기로 한 태아의 기억으로 가서 이제 살아보았으니까 비록 모두의 답은 아니고 ‘나’만의 이야기겠지만 그 대답을 하러 가기 위해 여우는 발이 부르트게 걸었을 것입니다. 숨을 잃은 털 위로 희미한 빛과 바람의 화학이 내려앉고 그래도 잊지 못하는 마음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만나야 하는 일생의 사건사고를 향해 삼원색 프리즘.. 2012. 7. 2.
오감도 시 제2호 / 이상(李箱) 오감도 시 제2호 이상(李箱. 1910 ∼ 1937)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조선중앙일보」(1934. 7. 24)- 위의 시는 난해하다고 소문난 이상(李箱)의 시 중 제2호입니다.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으로부터 이 시에 관한 여담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상(李箱)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하셨네요. 1933년경 이상이 황해도에서 금홍이와 알고 지낼 때 그곳 이발소에서 시상(詩想)을 얻었다는 것이지요. 평소에 수염이 길었던 이상이.. 2012. 6. 25.
입관 / 마경덕 입관 마경덕(1954 ~ ) 하얀 보에 덮여 누워있는 어머니 둥근 베개 하나가 무거운 잠을 받치고 있었다 장례지도사인 젊은 염습사는 보 밑으로 손을 넣어 익숙하게 몸을 닦았다 감정은 삭제되고 절차만 기억하는 손길로 미처 살아보지 못한 생의 끝자락을 만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주검을 갈무리하여 먼 길을 떠나보냈을까 저 숙련된 손길은 어느 날, 떨어져나간 단추를 주워 제자리에 달듯 벌어진 틈을 메우고 있는 것 하얀 종이로 싸늘한 몸을 감싸는 동안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아온 족적이 다 찍힐 것 같은 순백의 백지는 어머니의 마지막 속옷이었다 자식들이 사준 속옷은 장롱에 켜켜이 쌓아두고 구멍 난 내복만 입던 어머니 며느리에게 퍼붓던 불같은 성깔도 다 시들어 몇 장의 종이에 차곡차곡 담기는 순간, 눈물이 나오지.. 2012. 6. 18.
병원 / 윤동주 병원 윤동주(1917~1945)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시집 (1948)- 산문체의 일기로도 느.. 2012. 6. 11.
춘방다방 / 노향림 춘방다방 노향림 (1942 ~ ) 단양군 별방리엔 옛날 다방이 있다 함석지붕보다 높이 걸린 춘방다방 낡은 간판 춘방이란 나이 70을 바라본다는 늙은 누이 같은 마당 향기 없이 봄꽃 지듯 깊게 팬 얼굴에서 그래도 진홍 립스틱이 돋보인다. 단강에 뿌옇게 물안개 핀 날 강을 건너지 못한 떠돌이 장돌뱅이들이나 길모퉁이 복덕방 김씨 지팡이 짚고 허리 꼬부라진 동네노인들만 계란 노른자위 띄운 모닝커피 한잔 시켜 놓고 종일 하릴없이 오종종 모여 앉아 있다. 한참 신나게 떠들다가 오가는 사소한 잡담들이 열정과 불꽃도 없이 슬그머니 꺼져 구석의 연탄재처럼 식어서 서걱거린다. 네 평의 홀엔 다탁도 네 개, 탁자 사이로 추억의 '빨간 구두 아가씨'가 아직도 흐르는 곳 행운목과 대만 벤자민이 큰 키로 서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 2012. 6. 4.
첫사랑 / 채수영 첫사랑 채수영 (1964 ~ ) 태인댁은 엉덩이를 까고 수돗가에서 일을 보았다 언 바닥이 쉬이이 갈라지며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훅 스쳤다 술청에서 손님이 보건 말건 속곳부터 치마까지 뒷수습하는 일도 서두르지 않았다 괜히 달아오른 애송이에게 분 냄새를 풍기다가 묘하게 웃으며 옛다, .. 2012.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