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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 마종기

by 언덕에서 2012. 7. 9.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마종기 (1939 ~ )

 

 1. 옥저의 삼베

 

중학교 국사시간(國史時間)에 동해변(東海邊) 함경도 땅, 옥저(沃沮)라는 작은 나라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발 꿈에 나는 옛날 옥저 사람들 사이에 끼여 조랑말을 타고 좁은 산길을 정처 없이 가고 있었습니다. 조랑말 뒷등에는 삼베를 조금 말아 걸고 건들건들 고구려(高句麗)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삼베 장수가 된 것이 억울해 마음을 태웠지만 벌써 때 늦었다고 포기한 채 씀바귀 꽃이 지천으로 핀 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딴 나라의 큰 마을에 당도하고 금빛 요란한 성문이 열렸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지금은 잊었지만, 나는 그때부터 이곳에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옥저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도 혼자서 이 큰 곳에 살아야 할 것이 두려워 나는 손에 든 삼베 묶음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참았습니다. 그때 그 삼베 묶음에서 나던 비릿한 냄새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삼베 냄새가 구원인 것처럼 코를 박은 채 나는 누구에겐지도 모르게 안녕, 안녕 계속 헤어지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헛다리를 짚으면서도. 어느덧 나는 삼베 옷을 입은 옥저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래 전 국사 시간에 옥저라는 조그만 나라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2. 기해년(己亥年)의 강(江)

 

 슬픔은 살과 피에서 흘러 나온다.

 기해(己亥) 순교(殉敎) 복자(福者) 최창흡

 

 이 고장의 바람은 어두운 강(江) 밑에서 자라고

 이 고장의 살과 피는 바람이 끌고 가는 방향(方向)이다.

 서소문(西小門) 밖, 새남터에 터지는 피 강(江)물 이루고

 탈수(脫水)된 영혼은 선대(先代)의 강(江)물 속에서 깨어난다.

 안 보이는 나라를 믿는 안 보이는 사람들.

 

 희광이야, 두 눈 뜬 희광이야,

 19세기 조선의 미친 희광이야,

 눈 감아라, 목 떨어진다, 눈 떨어진다.

 오래 사는 강(江)은 향기 없는 강(江)

 참수(斬首)한 머리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는

 한 나라의 길고 긴 슬픔이다.

 

3. 대화(對話)

 

 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꺼야?

 가 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꺼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꺼다.

 아빠는 아빠 나라로 갈 꺼야?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 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더 쓸쓸할 것 같애.

 죽어두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문학과지성사,1980)-

 

 

 


 

마종기 시인의 시에는 쓸쓸함과 회한이 묻어 있습니다. 그것은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숙명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의 시에는 고국에 대한 연민과 충정, 고국에서 보냈던 소년기와 청년기의 기억과 회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들 중의 하나가 언제나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시는 말하자면 대작입니다. 속에는 각각 번호를 단, 정조가 다른 세 개의 시가 포함되어 있구요. 처음의 시 <옥저의 삼베>는 역사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알지 못할 운명을 맞이한 소년의 막막한 슬픔을 담은 시인의 꿈 이야기입니다. 제가 볼 때는 화자의 전생을 탐구하는 듯합니다. 전설의 발단 부분 같은 이 짧고 아름다운 이야기에서, 삼베는 왜 중요한지, 소년은 왜 고구려에 남아 살아야 하는지, 꿈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가 옥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은 또 무슨 암시인지가 궁금하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쉽게 풀리지 않아도 이 시는 그대로 아름답군요.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할 운명은 실제 시인의 처지를 연상하게 하지만 기계적인 풀이가 오히려 시를 삭막하게 이해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무겁고 비장한 두 번째 시 <기해년의 강>은 종교색이 강합니다. 천주교들이 1839년에 당한 기해사옥을 의미하는군요.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 또 다른 믿음 때문에 남의 목숨을 빼앗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나름의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시 전체의 제목이 되고 있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의 의미는 뚜렷해집니다. 그 의미는 이 세상에서 만져보고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구극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서글픈가요. 사랑의 나라는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의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쫓으며 살아갔고 또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 작은 시 <대화>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저는 이 대화가, 시인과 그의 아버지(아동문학가 마해송), 그리고 시인과 그의 아들 사이의 대화를 겹친 이미지로 읽곤 합니다. 아버지가 이미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전자로, `할아버지'와 시 쓰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어느 하나라고 꼬집어 말하기보다는 그것들을 두루 포괄하는, 달리 말하자면 시인 내면의 두 목소리라고 설명해야 할 듯합니다. 저는 이 세 번째 소품이 특히 좋습니다.

 여기서 대를 이은 내력으로 이국에서 살아가는 한 시인의 속마음은 매우 시적인 방식으로 정돈되어 드러나 있습니다. 왜 그는 낯선 말들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은 이 시를 거듭 읽어보면 어느 순간 풀리게 되지요. 뒤에 사족처럼 붙어 있는 시행을 다시 기억해봅니다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  이 부분에서 안타까움으로 저는 눈물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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