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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101

낙엽을 태우면서 낙엽을 태우면서 이효석(李孝石, 1907∼1942)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새 날아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삼십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건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제일 귀찮은 것이 담쟁이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굴뚝의 붉은빛만 남기고, 집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거들떠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 2023. 11. 24.
감사 / 임옥인 감사 임옥인 (1915 ~ 1995) 오늘은 우리가 새 집을 짓기 시작하는 날이다. 평생 '임시'와 '방랑'을 면하지 못했다. 이제는 안주하고 싶은 것이다. 기쁘다. "얼마나 더 살려고 그래?" "누구에게 물려주려고?" 내가 집을 짓겠다고 할 때, 이렇게 말하는 벗들도 있었다. 내가 늙은 탓이고 나에게 아들딸이 없는 까닭일 것이다. 이 말들 속에는 물론 내가 고생할 것을 염려하는 따뜻한 우정도 들어 있다. 그러나 나는, '비록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집이 누구에게 돌아간들 어떠랴. 누구라도 들어와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로써 족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했다. 말할 수 없이 신선한 오전이었다. 아름답게 흐르는 오월.. 2017. 4. 19.
동물들은 모두 서정시인 / 최재천 동물들은 모두 서정시인 최재천(1954 ~ ) 3월 21일은 ‘세계 시인의 날’이다. 지난 세기가 저물던 1999년 제 30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제정했다.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파리를 비롯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시 낭송회가 열린다. 평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시 한 편 읽을 여유조차 갖기 어려운 생활이지만 시의 날이라 하니 나도 모르게 시집에 손이 간다. 요즘 참 아름답고 좋은 시들이 많이 있는데 그에 비하면 읽는 이들이 너무 적은 것 같다. 동물도 과연 시를 쓸까? 시란 “자기의 정신생활이나 자연, 사회의 여러 현상에서 느낀 감동이나 생각을 운율을 지닌 간결한 언어로 나타낸 문학 형태”라는 어느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른다면 나는 이 세상 거의 모든 동물들이 다 시인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봄이 되어 해가.. 2016. 3. 23.
남자의 순정, 사랑과 상처 사이의 그 어떤 증상 / 유성용 남자의 순정, 사랑과 상처 사이의 그 어떤 증상 유성용 “아프면 남자가 더 아프지.” 전라도 어느 지방도시의 조직을 이끄는 젊은 보스는 그렇게 말했다. 애인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다 물리고 어느 허름한 술집에 와서, 붉은 불빛 아래 고개를 푹 처박고 술 먹고 있었다. “왜 그 여자가 잘 못 지낸답니까?” “아니요, 어디서 잘 살아야겠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는 역시 깡패구나 했다. 깡패들은 본디 소통하지 않고, 혼자서 마음먹고 감당한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대화하지 않고 넌 내 친구고, 넌 내 애인인데, 어찌 애인의 안부를 알까. 내가 아는 한 부산 청년은 중학교 중퇴를 하고, 어려서부터 유흥업소에서 일했다. 그 때 같은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를 만나 동거를 했다. 한.. 2016. 3. 16.
슬픔의 냄새 / 이충걸 슬픔의 냄새 이충걸 복사를 하려다 통증을 느꼈다. 페이퍼 컷이었다. 나는 상처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손가락을 위로 들어올렸다. 실 같은 핏자국이 비쳤다.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파열된 혈관은 수선하는 메카니즘이 금방 가동되겠지. 그러니 필요한 건 시간이다. 모든 치유 과정은 그렇게 면역 체계를 가지고 같은 ‘용의자’의 재공격을 막아주는데, 왜 상처가 아물었던 자리엔 언제나 옛 상처를 대신해서 새로운 상처가 돋는 걸까? 퇴근을 하고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달리기를 마쳤을 때처럼 체온이 올라갔다. 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의 하얀 껍질을 밟고 멈춰 섰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휩쓸린 기억은 남아 있지만, 어쨌든 순환 속에서도 맞이하고 또 떠나보낸 겨울 속에서 나는 나이를 .. 2016. 3. 9.
침향(沈香) / 정목일 침향(沈香) 정목일(1945 ~ ) ‘침향(沈香)’ 이란 말을 처음 듣게 된 것은 어느 날의 차회(茶會)였다. 뜻이 통하는 몇몇 사람들이 함께 모여 우리나라의 전통차인 녹차(綠茶)를 들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 한 달에 한 번씩 있었다. 차인(茶人) ㅅ선생이 주재하시는 차회(茶會)에 가보니 실내엔 전등 대신 몇 군데 촛불을 켜놓았고 여러 가지 다기(茶器)들이 진열돼 있었다. ㅅ선생은 끓인 차를 찻잔에 따르기 전 문갑 속에서 창호지로 싼 나무토막 한 개를 소중스럽게 꺼내 놓으셨다. 그것은 약간 거무튀튀한 빛깔 속으로 반지르르 윤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관솔가지처럼 보이는 이 나무토막을 ㅅ선생은 양손으로 감싸 쥐고 비비시며 말씀해 주셨다. “이게 침향(沈香)이라는 거요.” 나를 포함한 차회 회원들은 그 나무.. 2016. 2. 29.
노란 종이우산 / 남미영 노란 종이우산 남미영 (1943 ~ ) 한지에 콩기름을 먹여 만든 노란 종이우산이었다. 아버지는 손잡이 부분을 빙글빙글 돌려 우산을 활짝 펴주시며 말씀하셨다. "학교에 가다가 키 큰 어른이 같이 쓰자고 하면 안 된다고 하거라. 키가 너만한 아이는 같이 써도 좋지만." 우산을 쓰고 골목길에 나오니, 가겟집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남자 어른이 껑충 뛰어나오며 말했다. "아가, 나하고 좀 같이 쓰자." "어른하고는 안 돼요. 키가 나만한 아이는 괜찮지만요." 나는 얼른 대답했다. "허, 고거 참." 어른이 혀를 차며 도로 추녀 밑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다시 나오며 말했다. "아가, 그럼 내 키를 이렇게 줄이면 되잖아? 이렇게 하면 너하고 똑같으닝께…." 어른이 다리를 반쯤 접고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채 .. 2016. 1. 25.
모색(暮色) / 이영도 모색(暮色) 이영도(1916 ~ 1976) 지극히 그리운 이를 생각할 때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돌 듯, 나는 모색(暮色) 앞에 설 때마다 그러한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이 가장 순수해질 때는 아마도 모색과 같은 심색(心色)일는지 모른다.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같은 빛, 모색은 참회의 표정이요, 기도의 자세다. 하루 동안을 겪어낸 번잡한 과정 다음에 밀려드는 영육(靈肉)의 피로와 허황한 감회는 마치 한낮의 강렬했던 연소(燃燒)의 여운이 먼 멧등에 서리듯 외로움이 감겨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유명한 화가 밀레도 한 가족의 경건한 기도의 모습을 모색 앞에 세우고 그림의 제목을 이라 붙였는지 모른다. 황혼이 기울 무렵, 산 그림자 내리는 들녘에 서면 슬프디 슬픈 보랏빛 향수에 싸여 신의 음성은.. 2011. 8. 16.
나무 / 김광섭 나 무 김광섭 (1905 ~ 1977) 널찍한 마당도 아닌데 남쪽 한 귀퉁이에 파초 한 그루, 단풍 한 그루, 무궁화 한 그루와 풀 몇 포기가 살고 있는 조그마한 화단이 있어서 겨울을 지낸 마른 가지에 새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며 풀에는 어서 봄이 되어 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마루에 앉아서 외로울 때면 저으기 위로도 받으며 말은 없지만 변함없는 친구처럼 대한다. 그러니까 나무는 식물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나에게 친근해진다. 어떤 때에는 머리를 흙 속에 파묻고 땅에 거꾸로 서서 팔을 위로 올리고 하늘에 기도하는 경건한 자세같이 보이기도 하여 일생에 한 번도 경건한 마음을 가져 보지 못한 위인보다도 더 고상해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나무를 창생이라고 느끼는 때도 있다. 창생이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초.. 2011. 8. 9.
낚시의 즐거움 / 원응서 낚시의 즐거움 원응서(1914 ~ 1973) 1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즐거웠던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해 본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즐거움에도 크거나 작거나 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세분과 차이는 차치하고 개괄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내 경우엔 그 즐거웠던 나날은 낚시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만큼 내 생활의 즐거움은 낚시질하는 행위가 실어다 준 것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낚싯줄을 물에 드리우고 있지 않더라도 낚싯대가 낚시 연장을 매만질 때가 하루 중에서 즐거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가난한 묵객은 시름이 있거나 무료할 땐 벼루에다 연적의 물을 부어 먹을 벅벅 갈아 거기에서 안겨 오는 향기로움으로 인생을 달랬다고 한다. 참으로 운치를 .. 2011. 8. 4.
삶의 슬기 / 전숙희 삶의 슬기 전숙희(1919~ 2010) 밤새 훈훈히 김 오른 방문을 열고 청마루로 나서면 코끝이 짜릿하도록 부딪쳐 오는 싸늘한 아침의 감촉. 불기 없는 목욕탕에 받아 놓은 물 위엔 살얼음이 지고 뜰 앞에 서 있는 나무에 매달렸던 마지막 잎마저 떨어져 버리고 가지만이 생명 없는 표본인양 처량해 보이는 초겨울의 아침, 마치 새초롬하게 청초한 여인의 모습 같은, 그러한 초겨울 아침을 나는 좋아한다. 그래서 부엌에서 보글보글 밥 끓는 소리와 뽀오얗게 서린 김의 훈훈함이 더욱 정다운 아침, 또 어쩌면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나, 그 마음속에 너그러움과 따뜻함이 이끼처럼 깔려 있는 초로의 모습, 그러나 어딘지 범치 못할 단정함과 의연한 여인의 얼굴과도 같은 그 모습을 나는 사랑하고 싶다. 쌀뒤주에는 햇곡이 가득하고 .. 2011. 7. 28.
나의 소원 / 김구 나의 소원 김구(1876 ~ 1949) 1. 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達)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 2011.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