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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206

야간열차 / 이수익 야간열차 이수익 (1942 ~ ) 침목(枕木)이 흔들리는 진동을 머얼리서 차츰 가까이 받으면서, 들판은 일어나 옷을 벗고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어둠의 급소를 찌르면서 육박해 오는 상행선 야간열차. 주위는 온통 절교한 침묵과 암흑의 바다였다. 드디어 한 가닥 전류와 같은 관통이 풀어헤친 들판의 나신을 꿰뚫고 지나가는 동안 황홀해진 들판은 온몸을 떨면서 다만 신음뿐인, 올가즘에 그 최후의 눈마저 뜨고 있더니 열차가 지나가고 다시 그 자리에 소름끼치는 두 시의 고요가 몰려들기 시작할 무렵엔 이미 인사불성의 혼수에 빠져 있었다. - 시집 (예문관.1978) 에릭 파이가 쓴 여행 에세이 가 생각납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 자신의 숨은 열정을 일깨우고 정신의 방랑을 즐겼던 수많은 .. 2012. 11. 19.
몽해 항로 - 당신의 그늘 / 장석주 <인공위성에서 찍은 흑해 사진> 몽해 항로 ―당신의 그늘 장석주(1954 ~ ) 구월 들어 흙비가 내리쳤다. 대가리와 깃털만 남은 멧비둘기는 포식자가 지나간 흔적이다. 공중에 뜬 새들을 세고 또 셌다. 자꾸 새들을 세는 동안 구월이 갔다. 식초에 절인 정어리가 먹고 싶었다. 며칠 입을 닫.. 2012. 11. 12.
이런 시(詩) / 이상(李箱) 이런 시(詩) 이상(李箱. 1910 ∼ 1937)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 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 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위험하기짝이없는 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들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 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라.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 [가톨릭 청년] 2호(1933.7).. 2012. 10. 29.
시월 / 이시영 시월 이시영 (1949 ~ ) 심심했던지 재두루미가 후다닥 튀어 올라 푸른 하늘을 느릿느릿 헤엄쳐간다 그 옆의 콩꼬투리가 배시시 웃다가 그만 잘 여문 콩알을 우수수 쏟아놓는다 그 밑의 미꾸라지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봇도랑에 하얀 배를 마구 내놓고 통통거린다 먼 길을 가던 농부가 자기 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본다 (2005년 현대시학 11월호) 이 시에서는 아름다운 표현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가 엿보입니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을 가지고 맑은 서정이 넘치는 자연 서정시를 많이 썼지요. 시조의 수련에서 얻어진 언어적 절제력을 통해 전통적인 시적 감성을 새롭게 변용시켜 신선한 시각으로 절실한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에서는 시대와 사회 현실.. 2012. 10. 22.
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 무등(無等)을 보며 서정주 (1915 ~ 2000)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 [현대공론](1954년 8월호)- 이 작품은 미당이 6·25전쟁 직후 광주 조선대학.. 2012. 10. 15.
안현미 - 와유(臥遊) 와유(臥遊) 안현미 (1972 ~ )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 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 술에 취하리 ' - 『이별의 재구성』(창비 2009) 와유(臥遊)……. 사전을 찾아보니,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입니다. 안현미의 와유(臥遊), 이 시를 읽으면서 황진이나 허난설헌이 이 시대에 살았다면 저런 시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만.. 2012. 10. 8.
검은 전설 / 조향 검은 전설 조향(1917 ~ 1985) 하얀 종이 조각처럼 밝은 너의 오전의 공백(空白)에서 내가 그즘 잠시를 놀았더니라 허겁지겁 하얀 층층계를 올라버린 다음 또아리빛 달을 너와 나는 의좋게 나눠 먹었지 옛날에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고대(古代)의 원주(圓柱)가 늘어선 여기 내 주름 잡힌 .. 2012. 9. 24.
가을이 아침부터 슬프다는 이야기 / 임영창 가을이 아침부터 슬프다는 이야기 임영창 (1917 ~ 2001) 나의 시(詩)가 박하(薄荷) 솔 담배 연기와 교합(交合)하는 아침. 가을이 내 코 끝에 와 앉는다. 기지개를 쓰는 시혼(詩魂)이 나의 성감대(性感帶)를 간지르면 멀리서 들려오는 강릉 경포대(鏡浦臺)의 솔바람 소리. 나의 심장에 9월 18일의 캘린더가 걸린다. 나와 나의 세포들 그리고 안경도 만년필도 아침부터 피로롭다. 창백한 아침해가 덜 쇤 박처럼 떠오른다. 가을이 아침부터 슬프구나. -(문무사.1985)- 가을에 어울리는 시를 골라 보았습니다. 이젠 고인이 된 시인이 60세가 넘은 시기에 쓴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의 주인공은 시인 자신입니다. 그는 박하 향이 섞인 담배를 피우며 시를 짓다가 가을을 느낀 모양이군요. 그는 원고지 앞에 .. 2012. 9. 17.
저녁 스며드네 / 허수경 저녁 스며드네 허수경 (1964 ~ )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들이는 듯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 2012. 9. 10.
여름이 가다 / 노향림 여름이 가다 노향림 (1942 ~ ) 만날 사람도 없이 긴 나무의자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불콰하다. 닫힌 얼음집 앞에 빚더미처럼 여름이 엎질러져 있다. 문 안에서 누가 톱질을 하는지 새벽에서 밤까지 슬픔들이 토막으로 잘려나오는 소리. 질이 연한 내 마음이 아프다. 쭈쭈바를 입에 문 아이가 기웃거리다 지나가는 쪽 속이 편안한지, 덜컹거리며 가야 할 길 버리고 시동 걸린 화물트럭이 빈 채로 대기중이다. 큰길 옆 버즘나무 그늘 밑 사람들이 얼굴을 펴면 뜨내기 꽃들의 얼굴에도 햇볕이 환하게 빛났다. 몰래 내다 버린 화분 속에 관절을 앓는 남천이, 은침을 박고 있는 어깨와 겨드랑이에 여름이 환하게 지는 중이다. - 시집『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년 창비 초특급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그러고 나니 .. 2012. 9. 3.
여름 새벽 / 엄국현 여름 새벽 엄국현 (1952~ ) 풀잎 헤치면 여름 새벽이 숨어 있다 쉽게 들키지만 누가 영혼을 다치고 싶겠는가 맨살 젖어 이슬 남기고 사라지는 밤 알았다. 숨은 자는 왜 아름다운가 -(시로출판사,1983)- 위의 시는 자연이 지니고 있는 순결을 지켜주려는 시적 자아가 돋보입니다. 여름 새벽에 풀잎을 헤친다는 구체적인 국면을 간략하게 제시한 뒤 재빨리 그 때문에 풀잎이 이슬을 떨어뜨리게 된 안타까움을 우회적으로 묘사하여 감동을 주고 있네요. 여름 새벽에 풀잎을 헤친 인간의 무심한 행위가 풀잎에게는 영혼을 다친 일이라는 재치는 다만 뛰어난 언어 감각의 소산만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시인은 어느새 스스로 영혼을 다친 풀잎의 자리로 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소한 인위적인 일에도 훼손되는 자연처럼 시인도 세.. 2012. 8. 27.
메기의 추억(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 조지 존슨 메기의 추억(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George Johnson : 1839~1917) 동산엔 제비꽃 향기가 온통 가득하고 꽃들은 바람에 흔들려 아름답게 춤추고 있었지.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처음 고백했을 때 메기, 당신도 나만을 사랑한다고 말했지요. 숲 속 빈터는 밤꽃으로 어슴프레 반짝이고 나무에선 개똥빠귀새가 크게 노래 불렀지.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처음 고백했을 때 메기, 당신도 나만을 사랑한다고 말했지요. 햇볕에 반짝이는 황금빛 수선화 잎들은 산들바람에 마냥 춤추고 있었지.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처음 고백했을 때 메기, 당신도 나만을 사랑한다고 말했지요. 다가올 더 큰 행복을 전해 주려는 듯이 새들은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처음 고백.. 2012.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