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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반성 21 / 김영승

by 언덕에서 2012. 8. 13.

 

 

 

 

 

 

 

 

 

반성 21

 

                             김영승 (1959 ~ )

 

 

친구들이 나한테 모두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폐인이라고

규영이가 말했다. 너는 바보가 되었다고

준행이가 말했다. 네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고 현이가 말했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승기가 말했다.

모두들 한 일년 술을 끊으면 혹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술 먹자,

 

눈 온다, 삼용이가 말했다.

 

 

 

 - 시집 <반성, 민음사 2007>

 

 

 


알려진 대로 김영승 시인은 1980년대 현실을 특유의 해학으로 극복한 <반성>, 연시적 분위기를 저변에 깔고서 가혹하게 자아를 성찰하며 세상사의 이면을 뒤집어 보고 있는 <취객의 꿈>, 풍자와 야유의 방법으로 세상의 허위와 기만에 대응하는 <차에 실려 가는 차>(1989), 슬픔의 정조를 지닌 독설과 자학으로 권태에 대한 공격과 그 공격 자체에 대한 권태를 그려낸 <권태> 등의 시집에 실린 그의 시는 뒤틀림과 외설, 자조, 야유, 탄식 등을 통해 자아 성찰을 위한 노력 및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천국 백성이 소돔성에 수학여행 온 것처럼 백수(白手)의 시인은 1980년대의 모든 풍요를 충격과 좌절 속에서 견학합니다. 그 기행문이 또한 『반성』이네요. 반성을 한 이에게는 술 아니면 안 되는 어떤 갈증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수의 사색, 백수의 반성, 즉 백수의 탄식이 그를 술 마시게 합니다. 그는 저 통렬한 자기 풍자에 기대어 처연한 킬킬거림 속에서 한 시대의 비루함을 꿰뚫기도 하고 어루만져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반성> 속에서 “열악한 육체와 영혼의 평면도”를 참혹하게 그려냅니다. 이 작업은 훌륭한 시적 재질과 고도의 지성을 가졌으면서도 모든 경제적, 이념적, 도덕적 풍요로부터 소외당한 1980년대적 백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인가요.

 그의 시집 <반성>을 읽어가다 보면, 시인 김영승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진실을 파헤치는 시적 상상력입니다. 이 상상력은 풍자와 반성, 독설과 야유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바로 시인의 직관의 언어적 표현 능력에서 발현되고 있고, 특별한 윤리의식과 영성의 세계관을 구축합니다. 그의 ‘반성’은 시인으로서의 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린 ‘반성’의 시간이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술 먹자, 눈 온다….” 우리의 젊은 날은 저 대책 없는 목소리에 의해 대책 없이 위로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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