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206

모란 / 류 흔 모란牧丹 류 흔 (1964 ~ ) 1 모란시장의 명물은 누가 뭐래도 모란이다 붉은 꽃이 피는 서쪽 통로에 비명이 즐비하다 까딱, 지적指摘 한 번에 태어나는 죽음들 사시사철 살아있다는 것이 무료해 목에 칼 들이는 것들 살아온 날이 초 단위로 표시되는 전자저울 위, 애완의 추억 한토막이 척 올라앉았다 손님, 한 송이만 사가세요. 방금 꺾어서 싱싱합니다. 비좁은 화단 안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생화生花들이 오전에 꺼낸 동료의 내장을 먹는다 먹어야 산다, 살아야 죽을 수 있기에, 2 통로를 지나는 사람은 모두 면식범이다 띄워쓰기없는단골들, 장수원보신탕원조호남집보신탕언니네보신탕산골흑염소문형산토끼만수건강원여수토종닭오리현대건강원여주흑염소충남닭집영남흙염소형제흙염소영광축산장흥상회백세건강원전주건강원전남건강원전남가축무등흑염소소.. 2012. 5. 21.
등려군 / 박정대 등려군 박정대 (1965 ~ ) 등나무 아래서 등려군을 들었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다 이런 깊은 밤엔 등나무 아래 누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무슨 시를 쓰지, 잠시 고민하다 등려군이라는 제목을 써보았을 뿐이다 깊은 밤에, 뜻도 알 수 없는 중국 음악이 흐른다, 나 지금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있을 뿐이다 모니엔 모 위에 디 모 이티엔 지우 씨앙 이 장 포쑤이 더 리엔 난이 카우커우 슈어 짜이 찌엔 지우 랑 이치에 저우 위엔 쩌 부스 찌엔 롱이 디 쓰 워먼 취에 떠우 메이여우 쿠치 랑타 딴딴 디 라이랑타 하오하오 더 취 따오 루찐 니엔 푸 이 니엔 워 부 넝 팅즈 화이니엔 화이니엔 니화이니엔 총 치엔 딴 위엔 나 하이펑 짜이 치 즈웨이 나 랑화 디 셔우치아 쓰 니 디.. 2012. 5. 14.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 / 김소연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 -선운사에 상사화를 보러 갔다 김소연 (1967 ~ ) 꽃이 지고 잎이 난다 꽃이 져서 잎이 난다 꽃이 져야 잎이 난다 할망구처럼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 본다 목덜미에 감기는 바람을 따라온 게 무언지는 알아도 모른다고 적는다 바다 위로 내리는 함박눈처럼 소복소복도 없고 차곡차곡도 없었다고 지금은 그렇게 적어둔다 꽃 지면 나오겠다는 악속을 지킨 걸지라도 꽃 피면 나오겠다는 약속을 어긴 거라고 오히려 적어둔다 잘했다고 배롱나무가 박수를 짝짝 친다 저녁밥 먹으러 나는 내려 간다 고깃집 불판 위 짐승의 빨간 살점을 양양 씹는다 - 시집 지난 주에는 봄비가 흠뻑 내리는 통에 꽃들이 수난을 당했습니다. 더 꾸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화려하던 수 많은 꽃들 태반이 고개를 떨어뜨리.. 2012. 5. 7.
봄비는 즐겁다 / 송수권 봄비는 즐겁다 송수권 (1940 ~ ) 며칠째 봄비가 지난다. 한 떼씩 마치 진군의 나팔 소리 같다. 샤넬 향수병을 따놓은 병마개 같다. 촉촉히 마음에 젖어 드는 얼굴, 세상이 보기 싫다며 손나발을 입에 대고 불던 친구가 있었다. 물구나무 서서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건네보던 친구가 있었다. 젖지도 못하고 마른 종이처럼 구겨졌으면 어쩌나. 큰 길로 나서니 빨강 분홍 초록 파랑 우산 속에 소녀들의 밝은 표정이 갇혀 있다. 한 떼의 봄비처럼 조잘거리며 내를 건너 숲을 건너 밀림 속으로 사라져간다. 저 가벼운 종아리들, 문득 발을 막고 제재소가 나무 켜는 톱질소리가 들려온다. 향긋하다. 눈을 감는다. 거대한 삼나무 숲 속살들이 톱밥으로 무너져내린다. 자꼬만 밀림 속에서 휘파람새, 휘파람새가 운다. 생각이 발통이.. 2012. 4. 30.
안현미 / 시구문(屍口門) 밖, 봄 시구문(屍口門) 밖, 봄 안현미 (1972 ~ ) 착란에 휩싸인 봄이 그리워요. 비애도 회한도 없는 얼굴로 당신들은 너무나 말짱하잖아요. 착란이 나를 엎질러요. 엎질러진 나는 반성할까, 뻔뻔할까, 나의 죄는 가난도 가면도 아니에요. 파란 아침이고 시구문 밖으로 나가면 끝날 이 고통도 아직은 내 거에요. 친절하지 않을래요. 종합선물세트처럼 주어지는 생을 사는 건 당신들이지 나는 아니에요. 나는 착란의 운명을 타고난 빛나지 않는 별, 빛나는 별도 언젠가는 늙고 죽어요. 우리 모두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만 영원을 살 것처럼 착란 속에서 살며 비애도 회한도 모르는 얼굴로 우리들은 너무나 말짱해요. 착란에 휩싸인 봄이에요. 사랑 받을 수 있다면 조국을 배신하겠어요. 친구도 부정할 거예요. 전 세계가 어떻게 .. 2012. 4. 23.
낙화유수 / 함성호 낙화유수 함성호(1963~ )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 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 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남아일언이라도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지금, 순간 속에 있네 그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 2012. 4. 16.
화양연화 / 이병률 화양연화(花樣年華)* 이병률 (1967 ~ )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 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 2012. 4. 9.
그 봄비 / 박용래 그 봄비 박용래(1925∼1980)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박용래, 향토적인 정서를 시적 여과를 통해 간결하고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한 갈래를 형성한 분입니다. 또한 그는 향토적인 사물을 눈물겹도록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지요. 시류(時流)에 흔들리지 않고 타인을 눈치 보는 일 없이 자리 잡힌 자세로 자기의 아늑한 세계 안에서 꾸준하게 정진해 온 집착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그의 시는 모두 아름답습니다. 향토적인 사물이나 현상의 구석구석에 편재(遍在)한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그 에스프리를 추려 극도로 간결한 표현.. 2012. 4. 2.
이발사의 봄 / 장서언 이발사의 봄 장서언 (1912 ~ 1979) 봄의 요정(妖精)들이 단발하러 옵니다. 자주공단 옷을 입은 고양이는 졸고 있는데 유리창으로 숨어드는 프리즘의 채색(彩色)은 면사(面紗)인 양 덮어 줍니다. 늙은 난로(暖爐)는 까맣게 죽은 담배 불을 빨며 힘없이 쓰러졌습니다. 어항 속에 금붕어는 용궁(龍宮)으로 고향으로 꿈을 따르고. 젊은 이발사(理髮師)는 벌판에 서서 구름같은 풀을 가위질 할 때, 소리없는 너의 노래 끊이지 마라 벽화(壁畵) 속에 졸고 있는 종다리여. - [동광](1930년) - 1930년대 모더니즘 시인인 장서언의 시에는 그 이전의 서정시와는 달리, 현대적인 감각과 위트가 엿보이며, 다분히 회화성(繪畫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감각적 이미지즘의 모더니즘에 입각한 청신한 감각의 시를 썼습니.. 2012. 3. 26.
바람의 검심 / 박순원 바람의 검심 박순원(1965~ ) 술을 먹고 말을 타고 꾸벅꾸벅 졸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말이 옛 애인의 집에 다다랐다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팠으나 꾹 참고 지체없이 칼을 뽑아 말의 목을 내리쳤다 나는 말이 한 마리밖에 없었으므로 칼등으로 내리쳤다 나는 생명을 사랑했으므로 옛 애인은 반갑게 뛰어나왔다가 소리 없이 울기만 했다 나는 생명을 사랑했으므로 말이 한 마리밖에 없었으므로 너무 많이 취했으므로 가슴이 아파서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으므로 옛 애인은 이사를 했고 전화번호도 바꾸었다 그때 내가 칼날로 말의 목을 치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그 전에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한 것도 정말 잘한 일이다 위의 시를 읽으니 신라장군 김유신과 천관녀(天官女)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김유신은 다들 아실테고, 천관녀.. 2012. 3. 19.
몽해 항로 6 - 탁란 / 장석주 몽해 항로 6 - 탁란 장석주(1954~ )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을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감자의 실뿌리마다 젖꼭지만 한 알들이 매달려 옹알이를 할 뿐 흙에는 물 마른자리뿐이니까. 생후 두 달 새끼 고래는 어미 고래와 함께 찬 바다를 가르며 나가고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물 뜨러 간 어머니 돌아오시지 않고 나귀 타고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집은 텅 비어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지금은 탁란의 계절, 알들은 뒤섞여 있고 어느 알에 뻐꾸기가 있는 줄 몰라. 구름이 동지나해 상공을 지나고 양쯔강 물들이 황해로 흘러든다. 저 복사꽃은 내일이나 모레 필 꽃보다 꽃 자태가 곱지 않다.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좋은 것들은 늦게 오겠지, 가장 늦게 오니까 좋은 .. 2012. 3. 12.
우울한 샹송 / 이수익 우울한 샹송 이수익 (1942 ~ )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 있는 비애(悲哀)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衣裳)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 2012. 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