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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새벽부터 내리는 비 / 김승강

by 언덕에서 2012. 7. 16.

 

 

새벽부터 내리는 비

 

                                        김승강(1959~ )

 

비야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누이의 발길을 돌려놓아라 새벽에 꿈결에 깨어 어 비가 오네 하고 미소 지으며 달콤한 잠 속에 빠지게 해라 비야 노동판을 전전하는 김 씨를 공치게 해라 무더운 여름 맨몸으로 햇빛과 맞서는 김 씨를 그 핑계로 하루 쉬게 해라 비야 내 단골집 철자의 가슴속에서도 내려라 아무도 모르게 가슴속에 꽁꽁 감추어둔 철자의 첫사랑을 데려다 주어라 비야 내려라 내려도 온종일 내려 세상 모든 애인들이 집에서 감자를 삶아 먹게 해라 비야 기왕에 왔으니 한 사흘은 가지 마라 그동안 세상 모든 짐은 달팽이가 져도 충분하게 해라.

 

 

 

 


 

시인은 비가 많이 와서 쉴 사람은 좀 쉬게 해달라고 하늘에다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일만 하고 어찌 산단 말인가…….  일만 하라는 세상은 몹쓸 세상이다…….  비야 쏟아져라…….  연인들이 서로의 입에 감자를 넣어주며 가슴이 오그라드는 동안 세상은 달팽이 차지가 되어도 좋다…….  단골집 철자씨의 첫사랑을 찾을 여유를 주어라…….

 

 104년 만의 가뭄이라고 걱정하던게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인데 이제는 비가 너무 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지요. 위의 시를 읽으니 조선 중기의 가객(歌客) 김태석(金兌錫)의 시조가 생각납니다. 그는 대자연을 줄기고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으며, 창가(唱歌)∼작시(作詩)에 뛰어나 김우규(金友奎) 등과 함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의 1인으로 김수장(金壽長)ㆍ김천택(金天澤) 등의 뒤를 이었다고만 전해지네요. 위의 <새벽부터 내리는 비>가 전하는 것처럼 앞으로 며칠 더 오더라도 물난리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가뭄을 충분히 해갈시켰으니 이제는 김태석의 아래 시조를 읊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비 개거냐 삿갓세 호믜 메고

뵈잠방이 것오추고 큰 논을 다 맨 후에

쉬다가 점심(點心)에 탁주(濁酒) 먹고 새 논으로 가리라.

 

(오늘은 비가 개겠느냐? 삿갓 쓰고 호미 메고

베잠방이 걷어올리고 큰 논을 다 맨 후에

쉬었다가 점심에 탁주 먹고 다른 논을 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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