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층계
조향(1917 ~ 1985)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對話)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뽄다리아〉
<마주르카〉
<디젤 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受話器)
여인(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 <신문예, 1958>
위의 시는 1950년대 초현실주의 작품을 썼던 조향 시인의 대표작입니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지요. 평자들은 프랑스 초현실주의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원리를 도입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이하게도 초현실주의 문학운동에 평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근거한 무의식의 자동기술(自動記述)을 시작(詩作)의 근간으로 삼는 초현실주의 시들은 일반 독자에겐 매우 생소하고 난해합니다.
그는 시에 외래어를 대담하게 도입하고, 산문적ㆍ설명적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면서, 상상의 영역에 절대적 자유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의식의 심상을 발굴한 후 그것들을 비약ㆍ충돌하게 하는 초현실주의적 시풍을 우리 현대시에 실험한 대표적 시인이지요. 그는 생전에 시집을 내지 않은 걸로도 유명합니다.
앞서가거나 독창적인 사람은 대개 이단적(異端的) 저항적(抵抗的)입니다. 그것이 도전과 공격에 대한 유일한 자기방어의 수단이기 때문이지요. 귀재나 천재들의 이해하기 힘든 기벽이나 기행 등도 마찬가지 같군요.
그는 자신과 문학적 이념이나 노선을 달리하는 다른 문학 집단이나 문학인들과는 아예 교류를 기피했다고 합니다. 그는 철저하게 초현실주의 문학을 이론화 작품화하는 일에 정열을 기울이며 완고하고 집요하게 자기영역을 고수했습니다. 1956년에 조봉제 이인영 등과 ‘가이가(Geige)’ 동인지를 내었으나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19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사회정화위원회의 악역을 맡아 부산지역 예술인들의 경원과 기피대상이 되었다지요. 특이한 분입니다. 그는 항상 당당하고 세속적 평판에는 초연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의 곁에는 늘 여인이 있었다는데요. 비난하는 사람에겐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나는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연애를 한다. 겉으로 도덕군자연하면서 뒷전에선 온갖 부도덕을 자행하는 위선자들과는 다르다. 초현실주의는 가식을 가장 싫어한다. 사랑이란 삶의 원동력이자 흐르는 물처럼 한 곳에 머무를 수가 없는 것이다.”
조향시인의 장례식 장면을 신태범 작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유족들과 조객들의 흐느낌 속에 천천히 고인의 관(棺)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내며 흐느끼고 있던 한 여인이 갑자기 관을 붙들며 절규했다. “선생님! 이렇게 혼자 가시면 저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사람들은 잠시 의혹의 시선을 모았다. 첫눈에도 빼어난 미모의 그 여인은 모두에게 전혀 낯선 사람이었다. 여인은 관을 내리고 있는 사람의 팔에 매달리며 계속 울부짖었다. “저도 선생님과 같이 묻어주세요!” 그때였다.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고인의 부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그년 어서 같이 묻어버리세요!” 1984년 여름 초현실주의 시인 조 향(趙鄕 ·본명 燮濟·1917~1984)의 장례식 도중에 일어난 일이다.
1966년 그는 ‘한국초현실주의연구회’를 조직하여 초현실주의 문학운동을 계속했습니다. 동아대 문리대 학장으로 재직한 후, 그는 1984년 8월 초현실주의 회원들과 강릉 해수욕장에 수련을 겸한 하계휴양을 갔다가 갑자기 쓰러져 운명하고 맙니다.
지금도 초현실주의적인 실험시들이 일간지 지면에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선구자였던 그는 사후 20년 가까워서야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시인인 셈입니다. 어쨌거나 문학적으로는 너무 오래 동안 그를 없었던 사람처럼 기억의 뒤편에 묻어두고 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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