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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서정의 장소 / 장이지

by 언덕에서 2012. 7. 2.

 

 

 

서정의 장소

 

                             장이지(1976~ )

 

 

그것은 수구초심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껑더리된 늙은 여우가

짓무른 눈으로 가시밭길을 더듬어

난 곳을 찾아가는 것은

향수 그 이상의 마음입니다.

어미의 털이, 형제의 털이 아직 남아있는 굴,

시르죽은 여우가 거기서 몸을 말고 누워

죽는 것은, 깨어나지 않는 것은

그곳이 태아의 잠으로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몰라서

천지간에 살아보기로 한

태아의 기억으로 가서

이제 살아보았으니까

비록 모두의 답은 아니고 ‘나’만의 이야기겠지만

그 대답을 하러 가기 위해

여우는 발이 부르트게 걸었을 것입니다.

숨을 잃은 털 위로

희미한 빛과 바람의 화학이 내려앉고

그래도 잊지 못하는 마음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만나야 하는

일생의 사건사고를 향해

삼원색 프리즘의 날개를 펼 때

문득 바라본 저녁 하늘의 붉은빛과

쉼도 없이 흐르는 검푸른 강,

초록빛 꿈을 꾸고 있는 숲.

정념과 회한과 꿈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거기 보태어져 더 아름다워지는

필생(畢生)의 마지막이 있음을

여우의 마음은 알았을 것입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이 있음을.

 


 시집 <연꽃의 입술, 문학동네>

 

 

 

 

 


 

유교 경전 예기(禮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 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 나라를 일으켰던 태공(太公: 여상 또는 태공망)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죽어서 타향인 영구(營丘)란 곳에 묻혔지요. 그러나 5대 후손이 그가 살던 곳인 주(周)의 수도 호경(鎬京)에 이장(移葬)을 하였습니다. 군자가 말하기를,

 “음악은 그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바를 즐기며, 예(禮)란 그 근본을 잊지 않는 법이다.”

 옛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향하는 것은 인(仁)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수구초심이라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여우가 죽을 때 제 굴, 제 근원을 향해 고개 돌리고 죽는다는 수구초심, 명절만 되면 지옥과 같은 교통난을 감수하면서 그토록 끈질기게 고향을 찾아갑니다. 나를 낳아 주시고 부모님의 흔적이 있고 내 유년의 꿈을 키워 주었던 곳. 철마다 옷을 갈아입던 뒷동산에서 처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웠던 곳. 소꿉동무들의 그리운 웃음이 길목마다 묻어나는 곳, 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고향을 떠난 이들의 가슴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지요.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고향으로 두고, 강남에서 온 제비는 남쪽을 향하여 앉습니다. 연어는 수십 만 리를 떠나 살다가 고향 냄새를 기억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 모두가 다 수구초심에서 비롯한 것이지요. 이 세상의 정념과 회한은 모두 혈육의 털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 그 굴속을 그리워하는 가련한 마음과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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