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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206

풍경화 / 첸밍타이 풍경화 첸밍타이 먹을 뿌린 구름 아래론 울창한 산 하얗게 테를 둘렀고 산 아래론 끝없이 뻗은 광야 하얗게 테를 둘렀다. 눈은 아직도 내린다. 그날 함께 거닐었던 고요한 오솔길 국적이 다른 형제 두 사람의 발자취 그토록 환히 마음에 새기고 끝없이 꼬불꼬불한 길에 새겨 있다. 얼마나 불을 갈망했던가 주전자에 남은 소주 몇 방울까지 마시고 집에 돌아온 뒤 서로 건강하지고 서로 편지하자고. 그토록 진실한 약속을 교환한 것은 벌써 5년 전의 옛일 지금 아득하도록 소식 끊긴 채 어느 날인가 불쑥 부고를 받을지도...... 두 눈으로 응시하면서 어제 밟던 발자국을 그려서 벽에 붙이련다. 소박한 한 장의 풍경화를. 한 폭의 그림 속에 눈길을 묻는 동안 눈은 계속 쓸쓸히 내리고 있었다. - 신현림 엮음 시집 ‘딸아, 외.. 2012. 2. 27.
터미널의 키스 / 윤제림 터미널의 키스 윤제림(1960~ ) 터미널 근처 병원 장례식장 마당 끝 조등 아래서 두 사람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죽음과 관계 깊은 일, 방해될까 봐 빙 둘러 지하철을 타러 갔다. 휘적휘적 걸어서 육교를 건너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입맞춤은 끝났을까, 돌아가 내려다보니 한 사람만 무슨 신호등처럼 서서 울고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 사람이 나를 쳐다보며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라는지 가라는지 손수건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이별과 상봉의 터전, 터미널이 있고 그 근처에는 병원 장례식장이 있네요. 언제부터였을까요? 1990년대 초만 해도 병원 장례식장은 찾아보기 드물었지요. 요즘은 도.농을 불문하고 장례식을 집에서 치루지 않고 병원 장례식장에.. 2012. 2. 20.
먼 사람에게 / 박목월 먼 사람에게 박목월 (1916 ~ 1978) 팔을 저으며 당신은 거리를 걸어가리라. 먼 사람아. 팔을 저으며 나는 거리를 걸어간다. 그 적막. 그 안도. 먼 사람아. 먼 사람아. 내 팔에 어려오는 그 서운한 반원(半圓). 내 팔에 어려 오는 슬픈 운명의 그 보랏빛 무지개처럼……. 무지개처럼 나는 팔이 소실한다. 손을 들어 당신을 부르리라. 먼 사람아. 당신을 부르는 내 손끝에 일월(日月)의 순조로운 순환. 아아 연한 채찍처럼 채찍이 운다. 먼 사람아. 시를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저는 이 시를 박목월 시인이 쓴 연시(戀詩)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별의 노래', '방문'과 같은 시의 연속선상에서 읽어야 하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화자는 오늘도 나는 팔을 저으며 거리를 .. 2012. 2. 13.
겨울 낙동강 / 김여정 겨울 낙동강 김여정 (1933 ~ ) 저녁 으스름 속에 묵주를 든 산 앞에 깊은 상처 가슴 깊이 숨기고 비사(悲史)처럼 길게 누운 낙동강아, 아, 너였구나 군청빛으로 빠져드는 하늘에 사무치는 한(恨) 너였구나 오리 새끼들의 물발자욱조차 건망증으로 깜박이는 물속의 희미로운 불빛 서넛 사랑은.. 2012. 2. 6.
너무 아픈 사랑 / 류근 너무 아픈 사랑 류근 (1967 ~ )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 시집 이 시를 읽으니 故김광석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김광석 특유.. 2012. 1. 30.
해방촌 / 황인숙 해방촌 황인숙(1958~ ) 보랏빛 감도는 자개무늬 목덜미를 어리숙이 늘여 빼고 어린 비둘기 길바닥에 입 맞추며 걸음 옮긴다 박카스병, 아이스케키 막대, 담뱃갑이 비탈 분식센터에서 찌끄린 개숫물에 배를 적신다 창문도 변변찮고 에어컨도 없는 집들 거리로 향한 문 활짝 열어놓고 미동도.. 2012. 1. 16.
바람이 불면 / 이시영 바람이 불면 이시영 (1949 ~ ) 날이 저문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한 잔 해야지 붉은 얼굴로 나서고 싶다 슬픔은 아직 우리들의 것 바람을 피하면 또 바람 모래를 퍼내면 또 모래 앞이 막히면 또 한 잔 해야지 타는 눈으로 나아가고 싶다 목마른 가슴은 아직 우리들의 것 어둠이 내리면 어둠으로 맞서고 노여울 때는 하늘을 보고 걸었다 - 시집『滿月』창작과비평사 1976. 35쪽 이 시에서는 아름다운 표현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가 엿보입니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을 가지고 맑은 서정이 넘치는 자연 서정시를 많이 썼지요. 원래는 시조를 쓴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읽는 시마다 운율이 살아 있어서 읽기가 참 좋습니다. 시인은 시조의 수련에서 얻어진 언어적 절제력을 통해 전통적인 .. 2012. 1. 9.
내리는 눈발속에서는 / 서정주 내리는 눈발속에서는 서정주 (1915 ~ 2000) 괜, 찬, 타,…… 괜, 찬, 타,…… 괜, 찬, 타,…… 괜, 찬, 타,……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괜찬타,……괜찬타,……괜찬타,……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낮이 붉은 처녀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는 소리. …… 큰 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 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애기 작은 이애기들이 오부록이 도란그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산도 산도 청산도 안끼어 드는 소리. …… 미당 서.. 2011. 12. 26.
사령(死靈) / 김수영 사령(死靈) 김수영 (1921 ~ 1968)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시집 (1959)- 어쩌면 연애시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관념시로도 느껴져 대단히 난해하게 여.. 2011. 12. 19.
방문 / 박목월 방문 박목월 (1916 ~ 1978) --- 白髮이 되고, 이승을 하직할 무렵에 한번 더 만나보려니 소원했던 사람을 이제 방문하게 되었다. 덧없이 흐른 세월이여. 끝없이 눈발이 내리는구나. 그를 방문했다.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그를 방문했다. 내가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그는 집에 있었다. 하얗게 마른 꽃대궁이. 그는 나를 영접했다. 손을 맞아들이는 응접실에서. 그의 눈에는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이 어렸다. 나의 눈에도 눈발이 내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 차가 나왔다. 손님으로서 조용히 드는 잔. 담담하고 향기로운 것이 八分쯤 잔에 차 있다. 그를 방문했다.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하직했다. 하직맙시다. 이것은 동양적인 하직의 인사. 이 시는 목.. 2011. 12. 12.
고향설 / 조명암 고향설 (故鄕雪) 조명암 (1913 ~ 1993)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일세 깁흔밤 날러 오는 눈송이 속에 고향을 불러 보는 고향을 불러 보는 젊은 푸념아 소매에 떠러지는 눈도 고향눈 뺨우에 흐터지는 눈도 고향눈 타관은 낫설어도 눈은 낫익어 고향을 외여 보는 고향을 외여 보는 젊은 한숨아 이 놈을 붙잡어도 고향 냄새요 저 놈을 붙잡어도 고향 냄셀세 나리고 녹아가는 모란 눈 속에 고향을 적셔 보는 고향을 적셔 보는 젊은 가슴아 위의 시는 1942년 4월에 가수 백년설(본명 ; 이창민)이 발표한 유행가의 노랫말입니다. 제가 아는 모 작가가 술만 마시면 이 노래를 불러대는 바람에 저도 이제는 가사를 줄줄 외울 정도네요. 백년설의 노래를 찾아보았으나 Daum에는 없어서 부득.. 2011. 12. 5.
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 / 이백(李白) 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 이백 (李白 : 701 ~762) 兩人對酌山花開 一杯一杯復一杯 我醉欲眠君且去 明朝有意抱琴來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니 산꽃이 피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취하여 졸리니 그대는 가시게나 내일 아침 한 잔 생각나거든 거문고 안고 오시게 - 이백(李白), 술을 논하노라면 항상 나오는 명시(名詩)가 당나라 시대 시선(詩仙)으로 불렸던 이백(李白)이 쓴 위의 시입니다. 기나긴 여름이 끝나고 낙엽 지는 가을도 지나고 이제는 연말이 다가오니 기나긴 술자리의 레이스가 금주 말부터 시작되겠군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건가요? 술을 좋아하는 건 송강(松江) 정철(鄭澈)도 이백(李白)에 못지않았습니다. 송강은 에서 아래와 같이 읊고 있습니다. 한 잔(盞) 먹사이다 또 한잔 먹.. 2011.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