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206

망향 / 박화목 망향 박화목 (1924 ~ 2005)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 그 어느 산 모퉁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철 따라 핀 진달래 산을 덮고 먼 부엉이 울음 끊이잖는 나의 옛 고향은 그 어디런가 나의 사랑은 그 어디멘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 주렴아 그대여 내 맘속에 사는 이 그대여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 일레라 박화목 작사, 채동선(蔡東鮮) 작곡의 가곡입니다. 1933년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64년 작곡자에 의해 열곡의 다른 가곡과 함께 출판, 발표되었지요. 원래는 정지용의 시 에 곡을 붙인 것인데 지용에게 월북문인의 낙인이 찍힌 뒤 박화목의 으로 개사되었습니다. 이후 채동선의 유족들이 이은상 시인에게서 가사를 받아 일명 로도 알려져 있습니.. 2011. 11. 21.
동무생각 / 이은상 동무생각 이은상 (1903 ~1982) 1.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2. 더운 백사장에 밀려드는 저녁노을 위에 흰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3. 서리바람 부는 낙엽동산 속 꽃진 연당(蓮堂)에서 금새 뛸 적에 나는 깊이 물 속 굽어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꽃진 연당과 같은 내 맘에 금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뛰놀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4. 소리 없이 오는 눈발사이.. 2011. 11. 14.
이별의 노래 / 박목월 이별의 노래 박목월(1916 ~ 1978)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에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 2011. 11. 7.
가을편지 / 고은 가을 편지 고은(高銀 ; 1933~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비탈진 가을 산을 힘차게 오릅니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이 기억났어요. 젊어서야 제 몸 스스로 힘을 얻지만, 나이 들면 오직 먹는 것으로 몸을 유지한다고……. 바람에 자작나무는 기우뚱 흔들리고 늙은 할매 같던 싸리나무는 노랗고 정답게 물들고 있습니다. 곧 겨울이 오겠지요. 당단풍나무 잎들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붉게 물들었고, 홍시처럼 익은 주황색 이파리들도 곱습니다. 이러.. 2011. 10. 24.
꿈꾸는 가을노래 / 고정희 꿈꾸는 가을노래 고정희(1948~1991) 들녘에 고개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 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맥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스케일이 아주 큰 시입니다. 시인이 가을날에 관한 이 시를 쓸 때의 마음은 한반도는 배경으로 너무 좁기만 하군요. 처음에는 의아했다가 곧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맑고 넓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애초부터 대자연에 인간들이 정한 국경이란 우스운 것이지요. 들길에 코스모스 꽃 .. 2011. 10. 17.
아침 시장 / 이상국 아침 시장 이상국 (1946 ~ ) 화장을 곱게 한 닭집 여자가 닭들을 좌판 위에 진열하고 있다. 발가벗은 것들을 벌렁 잦혀놓아도 그들은 별로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다. 그 옆 반찬가게집 주인은 두 무릎을 공손히 꿇고 앉아 김을 접는다. 꼭 예배당에 온 사람 같다. 어느 촌에서 조반이나 자.. 2011. 10. 10.
가을 전어 / 정일근 가을 전어 정일근 (1958 ~ )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전어나 듬뿍 썰어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달라 하자 바다는 떼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 2011. 10. 3.
침대를 타면 / 신현림 침대를 타면 신현림(1961~ ) 침대를 타고 나는 달렸어 밤 도시를 돌고 돌았지 팽이가 돌 듯 머리 돌 일로 꽉 찬 슬픈 인생을 돌았어 내가 태어나 사랑하고 죽어 갈 이 침대 다 잃고 다 떠나도 단 하나 내 것처럼 남을 침대 결국 관짝이 될 침대 몸의 일부인 침대를 타고 달리면 물고기와 흰나비 떼들이 날고 슬픔까지 눈보라같이 날아 내일은 좋은 일만 생길 것 같고 세상 끝까지 갈 힘을 얻지 몸은 꽃잎으로 가득한 유리병같이 투명하게 맑아져 다시 태어나는 나를 봐 - 시집 침대의 역설이군요. 저는 지금도 맨 방바닥에 요를 깔았을 때 잠이 더 잘 와서 침대는 불편합니다. 시인이 말하는 침대는 삶의 숙명적인 동반자에 다름 아니군요. 침대와 같은 휴식의 자리, 안식의 공간이 없이는 우리가 태어날 수 없고 생활할 .. 2011. 9. 26.
시간들 / 안현미 시간들 안현미(1972 ~ )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입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입곱 걸음.. 2011. 9. 19.
추석 / 이성복 추석 이성복 (1952 ~ ) 밤하늘 하도 푸르러 앞산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흰 옥양목 빨래하고 나면 누런 삼베 헹구어 빨고, 가슴에 물 한번 끼얹고 하염없는 자유형으로 지하 고성소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 갔다 와도 다시 가고 싶으면 다시 갔다 오지 여태 살았지만 언제 정말 살았다는 느낌 한번 들었던가 음...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군요. 천상병 시인의 '소릉조'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명절의 정의는 이렇지요. 죽은 자들이 지금쯤 가족들과 모여 먹고 있을, 알 수 없는 송편의 맛. 명절은 그런 것이다……. 해질녘에 동네입구에 나왔더니 어느 집인가 현관문 한쪽 담벼락에 매달린 능소화 한 송이가 제 눈을 붙잡았습니다. 여름의 끝머리에 남은 마지막 능소화로군! 여.. 2011. 9. 10.
마음의 내과 / 이병률 마음의 내과 이병률(1967~ ) 이 말이 그 말로 들릴 때 있지요 그 말도 이 말로 들리지요 그게 마음이지요 왜 아니겠어요 몸피는 하나인데 결이 여럿인 것처럼 이 사람을 귀신이라 믿어 세월을 이겨야 할 때도 있는 거지요 사람 참 마음대로지요 사람 맘 참 쉽지요 궤짝 속 없어지지 않는 비.. 2011. 9. 5.
붉은 추억 / 정겸 붉은 추억 정 겸 (1957 ~ ) 경기도청 신관 앞 유토피아 정원 배롱나무는 입고 있던 꽃무늬 블라우스의 앞단추를 서둘러 풀어내고 있다 쏟아지는 붉은 웃음들 잘 익은 바람이 꽃술 살며시 만지고 간다 꽃잎과 꽃잎 사이를 비집고 힐긋 고개를 내민 도정 홍보판 ‘동탄에서 강남까지 18분, GTX* ’ 날씬한 기차가 시간을 조각내며 힘차게 달리고 있다 그녀가 배롱나무 아래서 비스듬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물방울무늬 원피스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간지러움에 배롱나무 덩달아 흔들거린다 사진 한방 찍는 사이, 서 있던 배롱나무 그녀를 와락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아니, 세상에나 벌건 대낮에 저렇게 진한 포옹을 하다니” 그녀의 가슴마다 꽃잎자국 선명하다 꽃잎에 입을 맞춘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백일홍 꽃잎 정말 맛이 있.. 2011. 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