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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220

방문객(訪問客) / 정현종(鄭玄宗.1939~ ) 방문객(訪問客)​ 정현종(鄭玄宗. 1939~ )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인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마음,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방문객」은 인간 존재와 관계의 본질을 섬세하고도 철학적으로 사유한 서정시이다. 시인은 ‘사람이 온다’는 일상의 사건을 ‘어마어마한 일’로 명명함으로써 타인의 존재 자체가 지닌 무게와 깊이를 환기한다. 누군가의 방문은 단순한 ‘출입’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 2025. 5. 28.
뼈아픈 후회 / 황지우(黃芝雨) 뼈아픈 후회 황지우(黃芝雨.1952∼ ) 슬프다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나에게 왔던 사람들,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서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신상(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2025. 5. 21.
분수(噴水) / 김춘수(金春洙) 분수(噴水) 김춘수 (金春洙.1922∼2004)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이렇게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왜 너는 이렇게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왜 나중에는이 찢어지는 아픔만을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이별의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왜 이런선연(鮮然)한 무지개로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 (1959) -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한 그리움 때문에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한 안타까운 발돋움을 하지만.. 2025. 5. 13.
그날 / 이성복(李晟馥) 그날 이성복(李晟馥, 1952~ )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 2025. 5. 9.
어떤 싸움의 기록 / 이성복(李晟馥) 어떤 싸움의 기록 이성복(李晟馥,1952∼ )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법(.. 2025. 4. 28.
단계(Das Stadium)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단계(Das Stadium)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모든 꽃이 시들듯이청춘이 나이에 굴하듯이일생의 모든 시기와 지혜와 덕망도그때그때에 꽃이 피어서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생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 마음은크게 서러워하지 않고새로이 다른 속박으로 들어가듯이이별과 재출발할 각오를 해야 한다.대개 무슨 일이든 처음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다.그것이 우리를 지키며 사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공간을 명랑하게 하나씩 거닐어야 한다.어디서나 고향처럼 집착을 느껴서는 안 된다.우리의 정신은 우리를 구속하려 하지 않고,우리를 한 단계씩 높여주며 넓혀주려고 한다.우리 생활권에 뿌리를.. 2025. 4. 2.
숨길 수 없는 노래 / 이성복(李晟馥) 숨길 수 없는 노래 이성복(李晟馥,1952~) 【숨길 수 없는 노래 1】 어두운 물 속에서 밝은 불 속에서서러움은 내 얼굴을 알아보았네.아무에게도 드릴 수 없는 꽃을 안고그림자 밟히며 먼 길을 갈 때,어김없이 서러움은 알아보았네.감출 수 없는 얼굴 숨길 수 없는 비밀서러움이 저를 알아보았을 때부터나의 비밀은 빛이 되었네 빛나는 웃음이었네.하지만 나는 서러움의 얼굴을 알지 못하네.그것은 서러움의 비밀이기에,서러움은 제 얼굴을 지워버렸네. 【숨길 수 없는 노래 2】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2025. 3. 28.
학살의 일부 4 / 김소연(金素延) 학살의 일부 4 김소연(金素延, 1967~) 아버지의 삶을 쓰기 위해 소설에 매달린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아버지 알코올에 중독된 자신을 이기지 못하시고 박카스 한 병짜리 농약을 마시곤 대낮 약수터에서 이승을 떠나셨다. 세상의 곤궁함과 그 곤궁함에 귀속되지 못하여 쩔쩔매던 중학교 때 수학 선생은 여관방에서 목을 맸고, 즐기던 그 술에 기분 좋게 취하여 귀가하던 나의 큰아버지께서는 세차장 홈에 빠져 어이없는 실족사로 삶의 문을 닫아걸었었다. 광부가 되려는 한 남자와 간호사인 한 여자가 독일로 흘러들어 사랑하고 결혼하였다. 그 부부는 채소가게로 성.. 2025. 3. 20.
북치는 소년 / 김종삼(金宗三) 북치는 소년                                                                        김종삼(金宗三, 1921~1984)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가난한 아이에게 온서양 나라에서 온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진눈깨비처럼. -시집 (삼애사.1969)-   세 개의 연이 모두 ‘∼처럼’으로 끝났다. 시 본문만으로는 내용이 애매하다. 팁이 있기는 하다. 제목 ‘북치는 소년’을 맨 끝으로 가져오면 시가 새벽빛처럼 밝아온다. 그렇더라도 아직 명확하지는 않다.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치는 소년’이라니…. 이 말에는 빈 공간이 있다. 그러나 비어 있는 그 자체로 완성이다. 어쭙잖은 설명으로 그 공간에 개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중.. 2025. 3. 13.
마을 / 박남수(朴南秀) 마을 박남수(朴南秀, 1918~1994) 외로운 마을이나른나른 오수(午睡)에 조을고. 넓은 마을에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 날…… 뜰안 암탉이제 그림자 쫓고눈알 대록대록 겁을 삼킨다. - [문장] 9호(1939. 10) - 이 시는 그의 첫 번째 추천작으로 평화로운 농촌의 여름날 오후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낸 서경적 경향의 서정시이다. 향토적 분위기의 간결한 시어와 '나른나른'ㆍ'대록대록'과 같은 의태어를 3연 7행의 짧은 형식에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효과적인 표현을 이루고 있다. 간결한 시어를 구사하고 있는 서경적인 경향의 서정시이다. 평화로운 마을의 정경과 함께,.. 2025. 3. 7.
눈(Neige) / 구르몽(Remy de Gourmont) 눈(Neige)                                                                    구르몽(Remy de Gourmont.1858∼1915) 시몬, 눈은 그대의 목처럼 희다.사몬, 눈은 그대의 무릎처럼 희다. 시몬, 그대의 손은 눈처럼 차갑다.시몬, 그대의 마음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불꽃의 입맞춤으로 녹는다.그대 마음은 이별의 입맞춤에 녹는다. 눈은 소나무 가지 위에 쌓여서 슬프다.그대의 이마는 밤새 머리칼 아래서 슬프다. 시몬, 그대의 동생인 눈은 안뜰에서 잠잔다.시몬, 그대는 나의 눈, 또한 나의 사랑이다.     【시 원문】 Neige / Remy de Gourmont Simone, la neige est blanche comme ton cou... 2024. 11. 27.
낙엽(Les feuilles mortes)/ 구르몽(Remy de Gourmont) 낙엽(Les feuilles mortes)/ 구르몽(Remy de Gourmont. 1858∼1915)  시몬, 나뭇잎이 떨어진 숲으로 가자.이끼며 돌이며 오솔길을 덮은 낙엽.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해.버려진 모습으로 땅 위에 흩어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 질 무렵 낙엽은 쓸쓸해.바람에 흩어지며 상냥하게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에 밟힌 낙엽은 영혼처럼 흐느낀다.날갯짓처럼, 여인의 옷자락처럼.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엾은 낙엽밤은 깊고, 바람이 옷깃을 스민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원문】 Les feuilles mor.. 2024.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