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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206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 / 예이츠(Yeats)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 / 윌리엄 예이츠(William Buttler Yeats. 1865∼1939)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욋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라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새의 날개 소리 가득한 그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20대에 다시 고향을 떠나 런던에서 생활하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 2024. 2. 6.
옷에게 바치는 송가(頌歌)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옷에게 바치는 송가(頌歌)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 아침마다 너는 기다린다. 옷이여, 의자 위에서 나의 허영과 나의 사랑과 나의 희망, 나의 육체로 너를 채워 주길 기다린다. 거의 꿈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물을 하직하고 너의 소매 끝으로 들어간다. 나의 발은 너의 발의 빈 구멍을 찾는다. 그렇게 해서 나는 너의 지칠 줄 모르는 성실성에 힘입어 목장의 풀을 밟으러 나온다. 나는 시 속으로 들어간다. 창문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 남자들, 여자들 사실들과 싸움들이 나를 이루어 간다. 나와 맞서서 나의 손을 만들고 나의 눈을 뜨게 하고 나의 입이 닳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옷이여 나도 너를 이루어 간다. 너의 팔꿈치를 빼고 너의 실을 끊고 그렇게 해서 너의 일생은 나의 일생의 .. 2024. 1. 10.
심훈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심훈(沈薰, 1901 ~ 1936)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1930. 3.. 2022. 8. 15.
안녕, 안녕 / 박남수 안녕, 안녕 박남수(1918 ~ 1994) 1. 눈총의 난타를 맞으며 실의를 부끄러움으로 바꾸어 지고 돌아오는 금의환향의 입구를 몰래 빠져나가는 좁은 출구에서 손 한번 흔들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비뚤어진 다리를 옮긴다 인사는 못하고 떠나지만 통곡하며 갔다고 전하여다오 2. 언어를 캐던 하얀 .. 2015. 12. 8.
강릉바다 / 김소연 <사진 출처 : 내셔널지오그래픽> 강릉바다 김소연(1967 ~ ) 우리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나면 이렇게 잘 닦여진 길 안에서 하염없이 걷고 걷고 또 걷고... 그러지 마요 길을 버리고 걸어가요 바다로 걸어 들어가요 넓은 앞치마를 펼치며 누추한 별을 헹구고 있는 나는 파도가 되어 바다 속에.. 2015. 12. 4.
결빙의 아버지 / 이수익 결빙(結氷)의 아버지 이수익(1942 ~ )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시린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 2013. 1. 7.
나무가 말하였네 / 강은교 나무가 말하였네 강은교(1945~ )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눕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눈 먼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잎새의 푸른 허리를 위해서 - 시집 (1988) 해 저무는 시간, 들녘의 나무가 말하였고 나무의 말을 간절한 마음으로 옮겨 적습니다. 지독히 아름다운 나무의 말을 사람의 언어로 제대로 옮기지 못한 죄가 한 해의 끝에 남습니다. 나무로 지은 언어의 사원, 시(詩)에 깃들어 오독(誤讀)의 권리를 남용한 죄까지 보태지구요. 대통령에 당선된 분, 축하드립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국민의 절반가량은 당신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 2012. 12. 31.
성탄제 / 김종길 성탄제 김종길(1926 ~ ) 어두운 방 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셨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 2012. 12. 24.
겨울바다 / 김남조 겨울바다 김남조 (1927 ~ )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시집 (1967)- 겨울에 어울리는 시 한 수 올려봅니다. 몹시도 좌절했었던 젊은 시절의 어느날, 해변에서 이 시를 되풀이해서 웅얼거렸던 기억이 나네요. 이 시는 겨울 바다가 주는 절망감과 허무 의식을 극복하고, 신념화.. 2012. 12. 17.
눈 / 김수영 눈 김수영 (1921 ~ 1968)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자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문학예술](1957. 4) - 요즘 뉴스는 눈소식 일색이군요. 저번 주 금요일에는, 눈이 잘 오지 않는, 제가 사는 부산에도 함박눈이 내리더군요. 위대한 시인 김수영이 쓴 위의 시는 그가 모더니스트로 활약하던 1940년대의 직설적인 시풍에서 탈피, 새로운 서정의 개화를 이룩한 아름다운.. 2012. 12. 10.
겨울기도 2 / 마종기 겨울 기도 2 마종기 (1939 ~ ) 1 이 겨울에도 채워주소서. 며칠째 눈 오는 소리로 마음을 채워 손 내밀면 멀리 있는 약속도 느끼게 하시고 무너지고 일어서는 소리도 듣게 하소서. 떠난 자들도 당신의 무릎에 기대어 포근하게 긴 잠을 자게 하소서. 왜 깨어 있지 않았느냐고 꾸짖지 마시고 당신에게 교만한 자도 살피소서. 어리석게 실속만 차리는 꿈속에서도 당신의 아픔은 당하지 않게 하소서. 겨울의 하느님은 참 편안하구나. 2 내가 눈물을 닦으면 당신은 웃고 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슬픔 속의 노래다. 노래 속의 기쁨이다. 벌판에서 혼자 떨던 나무도 저 멀리 다음해까지 옷 벗어던지고 혼절해버렸구나.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 시집 '그 나라 하늘빛'(문학과지성사. 1991. 10) 1965년 초여.. 2012. 12. 3.
빗소리 / 박형준 빗소리 박형준(1966~ )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월간『현대시학』(2009, 7) 제목 때문일텐데, 시의 화자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찾아왔던 여인은 가만가만 창문을 흔들었을 법합니다. 술청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여인은 사연이 있어 보일지언정 청승맞지는 않습니다. 시인의 예민한 시선은 소주잔에 남은 여인의 지문에까지 미친 모양이군요. 연상되는 이런 그림들은 모두 마지막 연 빗소리로 모아집니다. 빗소리가 빛처럼 반짝입니다. 이 시는 창문을 두드리는 작은 빗방울 소리를 밝은 귀로 들으.. 2012.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