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윤동주(1917~1945)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산문체의 일기로도 느껴지는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이 연희 전문학교 재학 중인 1940년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인이 가장 아꼈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 작품은 윤동주의 내면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설정된 배경인 '병원'은 고독한 밀실의 심상과 통하는 것으로 당시의 암울한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등장인물인 '여자'는 '나'와 동일시(同一視)된 인물로 현실적 상황에 견디지 못하여 지쳐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환자이군요. 의사의 치료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도 병의 원인을 모릅니다.
전문가들은 이 시를 두 가지 내용으로 해석하고 있더군요.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알았던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아픔을 노래했다고 보는 것이 그 하나이며, 암흑의 사회에서 고민하고 있는 정신적인 병세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윤동주의 다른 작품에서는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을 상징적 의미로 전달하려고 했지만, 이 시는 배경으로 설정한 '병원', 거기에 환자로 등장하는 '여자', 일광욕을 하는 정경, 꽃을 가슴에 꽂는 장면 등 모두가 상징적으로 제시됩니다. 이 시는 그의 다른 시 <또 다른 고향>과 함께 윤동주의 내면세계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군요. 분명히 시대고(時代苦)를 앓고 있음에도 병원이라는 사회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실로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성내고 싸울 수도 없는 인내만이 요구되지요.
그의 자필시집에는 <병원(病院)>이라는 또 다른 시집 제목이 쓰였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스스로가 병원이 되어 사회의 병을 고쳐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는 일제의 탄압이 점차 가혹해지던 답답하고 암울한 때이지요. 뜻있는 지식인들은 마치 병원에 입원한 환자처럼 밀폐된 공간에서 극한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폐 앓는 사람과 마음 아픈 사람과 의사가 등장하는 이 작은 알레고리는, 나라 잃은 시대의 어둠을 견뎌야 했던 순결한 영혼의 임상보고서입니다. 아프지만 병이 없다는 진단을 받은 끝에, 아픈 여자를 가까운 눈으로 보며 이 인물은 또 하염없이 아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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