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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춘방다방 / 노향림

by 언덕에서 2012. 6. 4.

 

 

 

춘방다방

 

                                          노향림 (1942 ~  )

 

단양군 별방리엔 옛날 다방이 있다

함석지붕보다 높이 걸린 춘방다방 낡은 간판

 

춘방이란 나이 70을 바라본다는 늙은 누이 같은 마당

향기 없이 봄꽃 지듯 깊게 팬 얼굴에서

그래도 진홍 립스틱이 돋보인다.

 

단강에 뿌옇게 물안개 핀 날 강을 건너지 못한

떠돌이 장돌뱅이들이나 길모퉁이 복덕방 김씨

지팡이 짚고 허리 꼬부라진 동네노인들만

계란 노른자위 띄운 모닝커피 한잔 시켜 놓고

종일 하릴없이 오종종 모여 앉아 있다.

 

한참 신나게 떠들다가 오가는 사소한 잡담들이

열정과 불꽃도 없이 슬그머니 꺼져

구석의 연탄재처럼 식어서 서걱거린다.

 

네 평의 홀엔 다탁도 네 개, 탁자 사이로

추억의 '빨간 구두 아가씨'가 아직도 흐르는 곳

행운목과 대만 벤자민이 큰 키로 서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본다.

 

장부없이 외상으로 긋고 가는 커피 값

시간도 외상으로 달아놓고 허드레 것처럼 쓴다.

 

판자문이 달린 딸랑종이 결재하듯 딸랑거릴 뿐

이 바닥에선 유일하게 한 자락 하는 춘방다방.

 

 

 

 


 

다방에 가본 지도 참 오래되었네요. 학생 때 음악다방에 가서 듣고 싶은 노래를 적은 쪽지를 DJ에게 내밀었던 기억도 있고, 군 복무시절, 휴가 나와서 터미널 다방에서 능청스럽게 레지 아가씨 손을 잡았던 기억도 나네요. 재떨이는 기본이었고 운세뽑기 하는 주발 모양의 기계도 있었지요.  이 시를 읽으니 아늑한 느낌을 주는 허름한 다방이 생각납니다. 이런 다방에서는 스타벅스 같은 세련된 전문점에선 느낄 수 없는 어떤 편안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련된 전문점이 아닌 촌스런 다방은 요즘 보기 힘든 것 같아요. 수년 전까지만 해도 농촌지역 경기를 대변하며 최고의 '시골 사랑방'으로 통했던 농촌다방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농촌인구의 감소와 노령화, 농촌경제 침체 등으로 읍·면 소재지의 다방을 찾는 고객이 크게 줄고 주문량과 매출이 부진하면서 휴·폐업하는 다방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지요. 종업원들의 인건비를 충당하지 못하는 다방에서는 주인이 직접 차를 만들어 손님에게 내놓는 게 보통이라고 합니다. 농번기만 되면 미니스커트에 스쿠터를 타고 농촌 들녘을 누비던 다방 여종업원들의 모습도 이젠 구경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는군요. 관공서 배달이 많았던 시·군청 소재지 일부 다방에서도 여종업원들을 태워 배달에 나섰던 일명 '오토맨'이 자취를 감추는 대신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오토바이 운전면허가 있는 주인, 여종업원들이 직접 스쿠터를 몰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위의 시에는 춘방이라는 촌스러운 이름과 도드라진 진홍 립스틱은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는 기표들이 골동품처럼 보입니다. 이런 다방에서 첨부한 흘러간 유행가를 들으면서 한나절쯤 빈둥거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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