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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100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죽음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죽음 사람이 살다 보면 위험하게 생명의 고비를 넘길 때가 있다. 우연히 신문에서 어느 명사가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경우를 칼럼으로 쓴 것을 보고 나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죽을 뻔한 고비를 딱 세 번 우발적으로 당했다. 남들처럼 불치의 병에서 회복되어 살아났다는 그런 영웅적인 투병 경험은 아니지만 내가 비명횡사할 뻔한 첫 번째 기억은 군에서 제대한 이듬해 여름 방학 때였다. 동아리 멤버의 누님 부부가 사는 가덕도라는 섬에 친구들과 함께 2박 3일의 일정으로 이른바 여름 캠핑을 간 적이 있다. 더위를 식히느라 물에 들어갔다가 발을 헛디뎌 깊숙한 곳에 빠지는 바람에 물귀신을 될 뻔했다. 다행히 그곳에 주재하던 해양경찰이 실신 상태의 나를 건진 후 인공호.. 2014. 11. 28.
스며드는 저녁 스며드는 저녁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들이는 듯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올리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 2014. 11. 21.
청춘을 돈과 바꾸겠다니 청춘을 돈과 바꾸겠다니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이 많으면 나쁜 일이 생기는 법이다. IMF로 상징되었던 그해, 좋은 일은 끝나고 나쁜 일이 몰리기 시작했다. 흔히들 직장생활의 운(運)은 좋은 상사를 만나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초.. 2014. 11. 14.
신부(神父)님과 냉담자(冷淡者) 신부(神父)님과 냉담자(冷淡者) 군 제대를 5개월 앞두고 사고를 당하여 석 달간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병장과 단기하사의 싸움을 말리다 손목이 골절되어 수술을 받게 되는 변을 당한 것이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듯이 나에게는 모처럼 갖는 휴식 시간이었고 특전사, 수방.. 2014. 11. 7.
옛날의 노래를 부르자 옛날의 노래를 부르자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주변에는 더 가난한 이웃들이 있었다. 앞집에 ‘박 씨 집’이라고 불리던, 노동하며 생계를 꾸리던 부부 슬하에 1남 5녀를 둔 가난하기 짝이 없는,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 집 큰아들과 나의 장형은 동갑이었는데, .. 2014. 10. 31.
선생님과의 재회 선생님과의 재회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까지를 포함해서 존경하는 스승님이 딱 한 분 계신데 그분은 고 3때의 담임 선생님이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의 일이다. 한번씩 고등학교 3학년 반창회가 열리는 모양이었는데 나는 야근이 많은 관계로 거의 참석을 하지 못했다. .. 2014. 10. 24.
어머니에 대한 기억 어머니에 대한 기억 이수억(1918 ~ 1990) 작. &lt;6.25동란&gt; / 1954, 캔버스에 유채, 131.8x227.3cm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어머니는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씀을 했다. “부활절 고해성사를 봤는데 신부님께 야단만 들었다.” “무슨 말씀이예요?” “고해소에 들어가서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해야 하는.. 2014. 10. 17.
추억의 미국소아과 추억의 미국소아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부산의 양정동에는 '미국소아과'라는 작은 동네의원이 있었다. 내가 중. 고 시절에 버스를 타고 통학할 때 그 동네 의원 앞을 매일 지나쳤다. '미국소아과…….' 나는 그 병원 간판을 볼 때마다 '원장이 미국(美國)이라는 나라를 무척 좋아하는가보다.. 2014. 10. 8.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그는 그 날 내 손을 꼭 잡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너와 나는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그냥 물 흐르듯 살아가면 어떠노? 친구라는 단어는 본래의 뜻이 변질된 것 같다. 친구라며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곽경택이 감독한 영화 ‘친구’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우리는 친구 아니가?’로 대표되는 ‘친구이니까 이유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도와주고 희생해야 한다’는 초등학교 동기들의 말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전을 찾아보니 친구란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 ‘친구’라고 부르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는 영어 friend 의미의 親舊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숭경의 대상에 대하여 존경과.. 2014. 9. 19.
첫사랑의 남편 첫사랑의 남편 어머니 손에 이끌려 다니던 성당에서 만난 친구들과 초등학교를 지나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토요일마다 성당 교리실에서 함께 보냈다. 그러나 다들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대학에 가고, 또는 회사에 취업하고 몇 년 있다가 군대에 입대하고 해서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 2014. 9. 12.
세상은 돌고 돕니다 세상은 돌고 돕니다 마흔 이후의 사람들이 훨씬 중후해 보이는 것은 입지(立志)의 중량보다는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 때문은 아닐까? 그 무게와 함께 사람들은 어떤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가슴이 어떻게 상실의 시간과 화해하는가라는 기술이 그것이다. 이 화해를 가리켜 ‘성장’이라고도 하고 ‘성숙’이라 부르기도 한다. 삼십대에 들어설 전후 시기의 일이었다. 종합상사에서 해외로부터 수입한 기계를 국내 영업 부서에서 불특정 업체에 영업하여 판매하던 시기였다. 인문계 출신이 기계의 성능이나 구조를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어차피 기업체에 몸을 담은 이상 넘어야 할 벽이었다. 밤을 새워가며 그 부분 관련 지식을 찾아서 공부하여 업무에 임했는데, 요즘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대가 아니어서 저녁에 업무가 끝나면 도서.. 2014. 9. 5.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있을까? ▲ 군대의 구타 사건을 다룬 영화 의 한 장면 나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이론 중 성선설(性善說)보다는 성악설(性惡說)이 타당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물론 예수나 석가처럼 인류에게 밝은 빛을 주신 분이 계셨고 슈바이처나 장기려 박사, 이태석 신부처럼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살다 간 선한 분이 적지 않으나 7:3 또는 8:2의 비율로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인간의 근본 성정(性情)은 바뀌지 않는다. 그 본성(本性)은 특히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충격적 사건이 반복될 수 있고, 그때마다 인간들은 또 충격을 받는다. “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지만, 만약 태어나야 한다면 궁벽한 산골에 가서 완벽하게 정직한 삶을 살고 싶다.” 몇 년 전.. 2014.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