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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by 언덕에서 2014. 9. 19.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그는 그 날 내 손을 꼭 잡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너와 나는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그냥 물 흐르듯 살아가면 어떠노? 친구라는 단어는 본래의 뜻이 변질된 것 같다. 친구라며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곽경택이 감독한 영화 ‘친구’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우리는 친구 아니가?’로 대표되는 ‘친구이니까 이유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도와주고 희생해야 한다’는 초등학교 동기들의 말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전을 찾아보니 친구란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 ‘친구’라고 부르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는 영어 friend 의미의 親舊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숭경의 대상에 대하여 존경과 복종을 나타내려고 입을 맞춤. 또는 그런 행동’을 親口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요즈음 나는 젊은 시절에 느꼈던 생각들이 그릇된 편견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자주 하곤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우정이다.

 성경에도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하듯 참된 우정이란 영원한 것이며, 그리스의 웅변가 키케로가 말하였듯이 “친구야말로 또 하나의 나”인 것이다.

 우정이란 개념에는 항상 ‘신의’, ‘우애’ 같은 단어들이 동반된다. 우정은 남성들의 전유물 같은 느낌이 들고 이러한 단어들은 폭력배들을 결속시키는 의리와 같은 끈을 연상시킨다. 친구를 위해 수십 명의 적들이 기다리고 있는 아지트를 찾아가 피의 복수를 벌이는 장면은 요즘에도 액션영화라 불리는 갱스터 무비에 흔히 접할 수 있다. 조직 폭력배들은 자신들만의 의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때로는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종지에 담아 나누어 마심으로써 ‘혈맹’을 과시하기도 한다. 그것을 따라하는 남성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과거 우정에 대한 이런 생각이 나의 편견이었음을 느끼고 있다. 동창회에 나갔더니 이십 년 만에 만난 동기가 자신의 처남의 금융 빚을 탕감해주지 않는다며 해당 금융사에 근무하는 나에게 ‘니가 무슨 친구냐’는 푸념을 한 적이 있어서 놀랬다. 나는 아는 사이와 친한 사이는 다른 것이고 한 학급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모두가 친구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의 행위나 신념이 잘못된 것임을 발견했을 때 즉각 시정하고 그 나쁜 부분을 버려야 하는 것처럼, '또 하나의 나'인 친구가 정도의 길을 걷지 않을 때 시정의 충고나 권유가 듣지 않을 경우에는 그를 버려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성들의 우정이란 대부분 사교적이며,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훈장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우정을 사교욕망의 거래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이해득실을 따지는 물물교환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남성들의 우정은 친절이라는 명함의 교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프랑스계의 자동차그룹에 넘어갔지만, 과거 내가 신설 자동차 회사 공장의 총무과장으로 근무할 때 수많은 동창들이 줄을 서다시피 나를 찾아왔다. 나와 친해지면 자신에게 또는 자신들이 근무하는 회사에 유무형의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전에 있지도 않았던 나와의 우정의 기억을 끄집어내느라 애를 썼으며 과거 나와의 우정은 아름다웠노라고 술회했다. 물론 나는 그들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으며 ‘친구’라는 단어의 개념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음은 물론이다. 이후 IMF가 닥쳐와서 회사는 파산하고 말았는데 내게 그 대단한 우정을 강조했던 친구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남성들의 가식적인 우정에 대해서 벤자민 프랭클린은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남자에게는 세 가지 충실한 친구가 있다. 하나는 함께 늙어가는 조강지처(糟糠之妻)이며, 나머지 둘은 함께 늙어가는 개 그리고 현금이다.”

 실제로 독일의 유명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말년에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어, 자신의 곁을 지킨 늙은 개를 바라보면서 “내 유일한 친구는 바로 너뿐이구나”라고 한탄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은가.

 제 아무리 인생 경기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던 영웅이라 하더라도 경기를 끝낸 대부분의 남성들은 패잔병에 불과하다. 전 유럽대륙을 지배하였으나 마지막에는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찾아오는 친구 하나 없이 쓸쓸하게 죽어간 나폴레옹도 그렇다.

 

 

 

 이럴 때마다 어릴 때 읽은 동화 하나가 요즈음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다.

 유난히 친구를 좋아한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돈을 쓰고 춤을 추곤 했다. 이를 보다 못한 그의 아버지가 청년을 나무라며 꾸짖었다. 그러자 청년은 대답했다.

 아버지, 저는 지금 친구를 사귀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평생을 통해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더 값진 일은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에 그의 아버지는

 "친구가 그리 좋으면 시험을 한번 해 보자"

며 제안을 했다

 아버지는 아들과 같이 돼지 한 마리를 잡았고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오자 돼지를 자루에 담아 아들에게 짊어지게 하며 말했다.

  "네가 그리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다 찾아가서 이렇게 말해라. 내가 어쩌다가 사람을 죽였으니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사정해 보아라, 그리하여 너를 받아 드리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아버지는 너에게 관여 하지 않겠다."

  아들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가장 친한 친구 집에 찾아 갔다

  "이봐 친구,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네. 잠시 피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하룻밤만 신세를 지려 하네."

 밤이 샐 때까지 아들은 그동안 사귀었던 수많은 친구들의 집을 방문했지만, 단 한 군데에서도 문을 열어 맞아들였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돼지 지게를 자신이 멘 뒤, 아들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진정한 친구를 만나게 해주겠다.”

  아버지는 성큼성큼 앞장서서 한 집을 방문하였다. 문을 두드리며 친구를 부르자 곧 안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여보게 내가 어쩌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네. 다름 아니라 나와 함께 이 시체를 묻고 나를 좀 숨겨 줄 수 있겠나?“

 이에 그 친구는 두말없이 아버지를 맞아들였다. 그제야 아버지는 지게에 맸던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가 평생을 통해 단 한 사람의 친구를 사귈 수 있다면 네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

 예로부터 흔히들 말하기를 어릴 적에는 부모가 좋고, 청년 시절에는 친구 따라 강남 가고, 결혼해서는 아내가 좋고, 중년이 되면 자식이 미덥지만, 늙어지면 다시 친구가 그리워진다고 한다.

 

 

 우정이란 사랑처럼 호들갑스럽거나 소모적이 아니며, 피붙이에 대한 정처럼 동물적이거나 눈멀지도 않은 그 특이한 형태의 교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그리 대단찮게 여겨지는 듯 보인다. 산업 사회가 새로이 설정한 여러 기능에 따라 만들어진 이런저런 집단에서 개별적인 선택없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동료 의식이 고색창연한 우정의 개념을 잠식한 탓도 있을 것이다.

 비록 고추가루도 제대로 섞이지 않은 떫은 김치 쪽에 쓴 술을 한 잔 나눌망정, 돈이 없어 분식집에 가서 라면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울망정, 보면 즐겁고 헤어지면 그리운 것이 진실한 친구다. 보면 즐겁고 헤어지면 그리운 친구 하나를 가질 수 있다면야 인생은 그것만으로도 살아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자부해도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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