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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옛날의 노래를 부르자

by 언덕에서 2014. 10. 31.

 





옛날의 노래를 부르자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주변에는 더 가난한 이웃들이 있었다. 앞집에 ‘박 씨 집’이라고 불리던, 노동하며 생계를 꾸리던 부부 슬하에 1남 5녀를 둔 가난하기 짝이 없는,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 집 큰아들과 나의 장형은 동갑이었는데, 아버님께서는 형이 국립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그 집 아들 앞에서 '대학생티'를 내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그해가 1974년이었다. 다 같이 가난한 집안끼리 누구 집 아들은 대학생이고 누구 집 아들은 공장에 다니던 것이 마음에 걸리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로부터 6년 후 나도 어렵사리 그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고 이후 7년이 지나자 군에 가서 제대하고 복학 후 졸업하고 취직하여 사회로 나가게 되었다.

 대기업 신입사원 시절, 패기만만하게 시작했던 직장생활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에서의 3년가량의 하숙생활은 피로감을 가중하고 향수병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날은 무슨 일이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상사와 고객에게 곤죽이 되도록 시달림을 당해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던 날이었다. 그것을 이유로 친한 동료와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마시다 보니 영등포시장 근처의 싸구려 선술집까지 가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술집은 흔히들 말하는 색주가였다. 맥주를 두어 병 시켜서 마시는데 예상하지 않은, 빨간 드레스를 입은 저급한 작부 풍의, 술집 아가씨 두 명이 옆에 앉아서 내심 놀라게 되었다. 그러다 그중 한 명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취중이지만 더 많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네의 여자아이에서 처녀가 되었다지만 분명히 얼굴 생김이 어린 시절 이웃 ‘박 씨 집’의 셋째 딸이었다. 가름한 얼굴에 찢어진 눈초리, 눈 밑의 점까지도 어릴 때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어설프게 서울말씨를 흉내 내고 있었지만 억센 경상도 사투리의 흔적은 어쩔 수 없었다. 스물일곱 여덟 정도였을까? 내가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아가씨, 고향이 부산 ○○동이지요?"

 "네, 어떻게 아세요?"

 "성이 박 씨 아닌가요?"

 "어머, 그걸 어떻게?"

 내 예감대로 답이 나왔으므로 질문은 계속 그칠 것이 없었다.

 "형제가 1남 5녀였지요?"

 "아저씬, 도대체 어떻게 그걸 ……."

 "……."

 그곳에서 마시다 남은 술을 동료와 비운 뒤 자리를 떴다. 찬바람 부는 늦은 가을의 서울 거리에서 '부모'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난하기는 그 집이나 우리 집이나 매한가지였지만 어린 시절 이후 15년이 지난 모습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뼈가 빠지게 짐승처럼 일하던 그 처녀의 부모님과 오빠가 떠올랐다. 부모가 열심히 사는 것과는 관계없이 자식의 운명이 비참하게 흐르는 것이라면 힘들게 노력해서 사는 부모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 날이기도 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쉽게만 살려 한다면 인생에서 ‘노력’이라는 단어는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은 분명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후 서울에서의 고단한 생활을 뒤로하고 고향인 도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매일 계속되었던 밤샘 근무로 심신이 피곤하던 삼십 대 초반의 어느 휴일이었다. 나른해서 소파에 앉아 졸고 있던 오후, 어머니는 밖에 누가 찾아왔으니 대문을 열어보라고 말씀하셨다. 대문을 여니 낯선 중년 부부가 서 있었다.

 “누구십니까?”

 “아, 막내아들이시네. 우리를 몰라보겠나?”

 “글쎄요……. 누구신지요?”

 그때 어머니가 마당으로 나오셨다.

 “아주머니, 저희를 알아보겠습니까?”

 “아이고, 세상에! 이게 누구야!”

 찾아온 그분들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우리 집에서 월세를 살았던 신혼부부였다. 부모님은 방 두 칸짜리 집에 한 칸을 세 놓았던 것인데, 당시의 신혼부부는 중후한 사십 대 중년 부부로 변해 있었다. 그분들은 중년이 되어 생활의 안정을 찾자 옛 자취를 찾기 위해 당시 우리가 살던 동네를 찾아온 것이다. 아랫동네를 헤매면서 30년 전 그 동네에 살던 우리 가족을 설명하니 다행히 이사한 우리 집을 아는 분이 위치를 알려줘 겨우 찾아왔다고 했다.

 아내가 다과상을 마련하여 담소가 시작되자 아저씨가 말을 꺼냈다.

“우리가 살았던 저 아랫동네에서 집을 찾느라 두 시간을 헤매었습니다. 그곳이 그곳 같고 ……. 그런데 가겟집 주인이 지금 살고 계신 집을 가르쳐 주었지요.”

 “응, 그 동네에도 지금도 당시의 이웃들이 많이 사니 그렇지.”

 “그래, 아저씨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면서요?”

 “어쩌겠어요? 명을 그렇게 타고 난 건데. 먼저 간 사람만 불쌍한 거지”

 “아래 동네에서 소문을 들으니 자식 농사를 잘 지으셔 아드님들이 모두 다 잘 되었네요.”

 “잘 되긴 뭘. 겨우 밥벌이나 하는 게지.”

 아주머니가 말을 거들었다.

 “당시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좋았던 것 같아요, 한 가족처럼 따뜻하게 지냈던 인정 넘치던 시절이었네요.”

 그 중년 부부, 1960년대 중반 막 결혼한 신혼부부는 청운의 꿈을 안고 지리산 인근 마을에서 대도시 부산으로 왔으나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 게다가 부부의 단칸방에는 스무 살이 넘는 시동생까지 얹혀서 살고 있었는데, 일 년이 지나자 아기까지 출산하게 되어, 네 평 남짓 좁은 방에 네 명이 거주하던 터였다. 당시 우리 집은 신발 공장 인근에 있었으므로 아저씨는 공장 정문 앞에 가게를 얻어 찐빵 장사를 시작했다. 부부의 생각처럼 장사가 잘되지 않아, 빵 만드는 솥을 움켜잡고 눈물을 자주 흘리셨고, 내 부모님은 그 부부를 감싸 안고 위로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후 부부는 몇 달 만에 빵집 문을 닫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에 그들이 신혼 시절 살던 집을 찾아온 것이다.

 아저씨는 이후 외항선을 타게 되었고 선박 회사의 중견 간부로 자리 잡아 지금은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듯했다. 두 분 슬하의 자녀는 잘 자라주어서 모두 미국의 명문대학에 재학 중이라고 귀띔했다. 아저씨는 감회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살아보니 너무 힘들었지만, 그렇게 힘들게 살던 그때가 참으로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한 가족처럼 대해주시던 아저씨 ․ 아주머니 두 분도 늘 생각했고요."

 그분 부부가 돌아가고 난 뒤 김소운 선생이 쓴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이 생각났다. 결과는 어떻게 되든 매사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은 항상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 선생 글의 결론일 것이다. 비관적이기만 했던 젊은 시절과 달리 요즈음 내가 자주하는 생각도 같다. 수필의 끝부분은 이렇게 매듭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날의 가난은 잊지 않는 게 좋겠다. 더구나 그 속에 빛나던 사랑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행복은 반드시 부(富)와 일치(一致)하진 않는다."는 말은 결코 진부(陳腐)한 일 편(一片)의 경구(警句)만은 아니다.”




- 월간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16. 11월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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