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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어머니에 대한 기억

by 언덕에서 2014. 10. 17.

 

 

 

어머니에 대한 기억

 

 

 

 

 이수억(1918 ~ 1990) 작. <6.25동란> / 1954, 캔버스에 유채, 131.8x227.3cm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어머니는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씀을 했다.

“부활절 고해성사를 봤는데 신부님께 야단만 들었다.”

“무슨 말씀이예요?”

“고해소1에 들어가서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해야 하는데 막상 죄를 고백하려니 죄지은 것이 생각나지 않더라.”

“그래서요?”

“이렇게 말했지. 신부님, 아무리 생각해도 죄지은 것이 없습니다.”

“아하, 그래서요?”

“신부님이 화를 내시더구나.”

“어떻게요?”

“'당신은 천사(天使)란 말이요!'하시며 화를 내시데?”

 

 

 고해성사(告解聖事, sacramentofpenance)는 가톨릭 신자가 알게 모르게 범한 죄를 성찰(省察)·통회(痛悔)·고백·보속(補贖) 등의 절차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는 성사를 말한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를 7성사의 하나로 부르는데, 죄를 통회하고 고백한 신자는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죄 사함(사죄)의 은총을 입고 사제가 정해 준 보속을 이행함으로써 죄를 보상하거나 속죄하게 된다.

 말년의 어머니는 순진하신건지 아니면 판단력이 흐려지신건지 너무 솔직한 고백을 하신 것이다. 이야기를 마치신 후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고 노쇠하셔서 세끼 식사하는 것과 기도 외에는 하는 일이 없으셨던 당신께서 지은 죄라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분에게 죄를 고하라고 하면 어쨌든 억지로 만든 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운데 계신 분. 처녀 시절 사진일 것이다>

 

 해마다 어머님 기일이 다가 오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내가 단 한 번 가보았던 어머니의 친정, 나의 외갓집은 경남 김해군 가락면 죽림리로 지금은 부산광역시에 편입되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교는 가락국민학교인데 부산에서 서부 경남으로 가는 고속도로변에서 만날 수 있다. 외삼촌은 보도연맹2에 가입했는데 이전에는 민청이라는 남노당 계열 단체의 경남 위원장이었다고 했다. 그는 전쟁 통에도 살아남았지만 또 한 명의 외삼촌은 6.25 전쟁 와중에서 우익에게 살해당했다. 십대 후반의 소녀는 오빠의 주검을 찾아 무수한 시체 더미 속을 헤맸던 것이다. 좌익간부 청년의 여동생인 어머니는 평생 '인터내셔널3'이란 노래를 기억하셨는데 소녀 시절에는 빨갱이의 여동생으로 불렸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6.25 전쟁 참전하셨는데 영천 전투에서 인민군에 의해 총상을 입으셨다.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를 약간 저셨는데 좌익 집안의 딸과 참전 용사의 결혼이란 것도 당연의 관례로는 흔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산 서면성당은 어머니와 내가 세례를 받은 곳이다. 당시의 주임신부는 김남수 신부님이었는데 무척 정이 많으신 분이라고 하셨다. 후일 수원교구 주교로 봉직하셨는데, 어머니가 평생 가장 존경하던 분이었다.

 어머니, 내가 서너 살 때 어린 나를 둥쳐 업고 보따리 광목 장사를 하셨다. 머리에는 옷감 보퉁이를 이고 몇 십 리 낙동강변 시골길을 걸으셨던 그때, 내가 발견한 것은 하늘의 뜨거운 햇빛과 감나무 사이에서 불어왔던 바람이었다. 지금도 시골 강변풍경이 항상 다정스럽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때 새겨진 심리적인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늘 생각해본다. 이후에는 부산 당감동 시장에서의 노점상을 하시다가 선지국밥 장사를 하신 기억이 난다. 47세의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시고 이듬해 당뇨병으로 실명하시어 이후 20년 동안을 힘들게 사셨다.  

 

♣ 

 

 

 

 어머니, 오랜만에 편지를 써봅니다. 몇 자 적다 보니 눈물이 나려합니다. 1982년 여름, 경남 창원시에 위치한 육군 39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신병교육 받느라 거품을 흘리고 있을 때 ‘야야, 일나그래이. 인자 다댔다. 힘덜드라도 훈륜 무사히 잘 밧아야 한데이’라는 내용의 어머니 편지에 답장을 한 이후로 32년만이군요.

 요즈음도 밥 먹을 때, 특히 김치를 먹을 때 어머니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만든 김치보다 더 맛있는 김치를 먹은 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제 말을 듣던 딸아이는 할머니 김치는 담근 그날만 맛있었다고 혹평을 하더군요. 게다가 걔는 할머니가 김치 양념을 만들 때는 화학조미료를 듬뿍 넣는 것을 항상 보았다고도 했지요. 그러나 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니야, 네 할머니 김치는 천상의 맛이었단다!"

 어머니는 갓 버무린 김치를 한 접시 따로 담아서 그것에 항상 깨소금과 참기름을 듬뿍 쳐서 밥상에 올리셨는데요. 지금도 그 맵고 고소한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신성한 내 새끼'라고 하셨던 딸아이는 이제 대학생이 되어 어머니가 최고라고 부르시던 그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운 어머니, 제가 어렸던 그날, 비 오던 날 부엌 앞 대뜰 위에서 어머니는 연탄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제게 부추전을 원하는 대로 부쳐 주셨지요. 처음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도 두 장만 먹으면 배가 부르고, 억지로 한 장을 더 먹으면 소화가 안 되어 헛배가 부르고 트림만 꿀꿀 올라오던 그 부추전이 어찌 그리 맛있던지요. 그때 어머니는 간간이 섞이는 빗소리 속에서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셨어요.

 “봄에 교향악이 울러 퍼지던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해가 갈수록 어머니가 내 어머니로 살아 실제로 생존하였다는 기억조차 불분명해지는 느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를 떠올리면 나는 어머니의 냄새를 기억할 수 있었고, 중풍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봉사가 되다시피 하여 비참한 고통 속에 돌아가셨던 어머니가 가여워 절로 눈물이 앞을 가리곤 했다. 또 가끔 꿈속에 어머니가 나타나시기도 했었다. 어머니와 둘이서 미사에 참석하기도 했고, 어머니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추억에서 사라지면 꿈속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이제 어머니는 꿈속에서조차 나타나지 않고 내게 과연 그런 어머니가 있었든가 하는 기억마저 아득하고 까마득할 뿐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 어머니도 이제 한때 이 지상에서 아들이었던 나를 더이상 추억 속에서조차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들과 어머니의 정으로 이따금 꿈을 빌려 통공(通功)4하여 서로의 영혼을 교류하곤 했지만 지금은 어느 곳에 계신지 모르는 어머니도 더 이상 자신의 몸을 빌려 태어났었던 아들이 기억 속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은상 작사, 박태준이 작곡한 '동무생각'이란 노래를 무척 좋아하셨다.

 

 

간밤 누가 내 어깨를 고쳐 누이셨나  

신이었는가

바람이었는가

아니면 창문 열고 먼 길 오신 나의 어머님이시었나

뜨락에 굵은 빗소리

 

 

 위의 시는 이시영 시인이 쓴 '자취'라는 시 전문이다. 그런데 나도 이제 늙어 가는지 위의 시인이 이야기하는 '자취'가 느껴진다. 아, 아무리 찾아봐도 도시의 아파트에는 나만의 뜨락이 없는 것이다.

 

 

 

 

 

 

  1. 세례받은 신자가 지은 죄를 고해 성사 때 고백하는 곳. [본문으로]
  2.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본문으로]
  3. 제1·2·3차 인터내셔널의 찬가였고 194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였다. 지금까지도 이 노래는 사회주의자와 몇몇 공산당의 비공식적인 찬가로 사용되고 있다. 1871년경 파리의 운송 노동자인 외젠 포티에는 "봉기하라, 지구상의 비참한 자들이여"(Debout, les damnés de la terre)로 시작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되자"(Nous n'étions rien donc, soyons tout)라고 외치는 내용의 시를 썼으며 얼마 후 릴의 공장노동자인 피에르 드제이테가 그 시에 음악을 붙였다. 2차례에 걸쳐 러시아어로 번역된 〈인터내셔널가〉는 1944년 3월 15일에 〈소비에트 연방 찬가 Gimn Sovetskogo Soyuza〉(이전에는 〈스탈린 찬가〉로 불렸음)로 대체되기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로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4. 분업으로 어떤 일을 이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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