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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추억의 미국소아과

by 언덕에서 2014. 10. 8.

 

 

 

 

 

추억의 미국소아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부산의 양정동에는 '미국소아과'라는 작은 동네의원이 있었다. 내가 중. 고 시절에 버스를 타고 통학할 때 그 동네 의원 앞을 매일 지나쳤다.

 '미국소아과…….'

 나는 그 병원 간판을 볼 때마다 '원장이 미국(美國)이라는 나라를 무척 좋아하는가보다 '는 생각을 하면서 무심히 그 앞을 오고 갔다.  멀지 않은 곳에 하야리아 부대라는 미군부대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병원은 제법 낡은 2층 건물이었는데 건물 앞에는 뜰이 있었고 그 뜰에는 꽃이 지천으로 심겨져 있었다. 국화와 수국이 주류였다.

 그리고 꽃이 피고 지듯 세월이 한참 흘렀다.

 40세 즈음의 어느 날, 근처에 들릴 일이 있었던지라 무심코 그 의원의 뜰에 들어가서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미국소아과' 한글 간판 아래에 한자로 씌어진 작은 글씨 다섯 자를 발견했다.   

 '美菊小兒科'……. 

 

 '美國小兒科'가 아니었다.  그 병원의 원장 선생은 국화와 수국을 무척 좋아했던 분일 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뜰에 주차장 대신 수국과 국화가 지천이던 그 의원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짐작컨대 내가 어릴 적 부터 있었던 동네의원이니 나이 많은 의사선생님은 이제 은퇴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며칠 전, 근처에 볼 일이 있어 갔더니 내가 30년 동안 보았던 그 병원자리에는 대형 고층건물이 대신하고 있었다.  요즘 동네마다 지천인 수국을 보니 갑자기 '미국소아과'가 생각이 났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해도 어린이라는 성장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 시기야말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어른이 된 뒤에도 잊히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어릴 때의 생활환경은 어른이 된 뒤에도 성격 형성에 오래도록 영향을 준다.

 부드러운 햇살 속에서 달리고, 뛰며, 고함을 지르고, 즐겁게 놀아야 할 어린이들이 요즘은 차에 밀리고, 빌딩에 위압되어 그들만의 활동무대를 빼앗긴 채 안방마님처럼 어른스러워지고 있다. 또한 어린이들이 코 묻은 돈을 가지고 가게에 가서 군것질 같은 것을 사려면, 껌이나 과자 따위의 이름이 온통 외래어로 되어 있다. 신문이나 인터넷, 텔레비전에서도 외래어투성이의 광고가 우박처럼 쏟아져 나온다.

 

 

 

 

 참으로 어른조차도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외래어들이 어린이들을 짓누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야말로 우리 어린이들은 우리말이 무엇이고 외래어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부터 외래어를 배우고, 외래어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우리말보다 외래어를 배우고 싶어 하거나, 사용하고 싶어 해서가 아니라,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강제로 외래어 사용을 권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린이들이 즐겨 먹는 과자의 이름까지 꼭 외래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제화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외래어를 남용한다는 것은 분명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의 발로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외세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사대주의 사상 속에서 살아온 슬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잊혀져 가는 ‘우리 것’을 되찾자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일부라도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나라와 차별되는 '우리 것'을 물려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어린이들이 먹는 음식이나, 입는 옷, 가지고 노는 장난감 등 어린이들의 주변에서부터 외래어를 추방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해야 할 것인데 좌우 진영의 편 가르기에만 몰두할 뿐 대부분의 사회 지도층들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어려서부터 외래어의 범람 속에 살다보면, 어른이 된 다음에도 우리 것보다는 외국 것을 더 아끼고 중요하게 여기는 못된 버릇이 생기게 될 것이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외래어 홍수 속에 물들고, 외국 것에 대한 부러움 속에 생활하도록 방치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위의 사진은 시내의 한 거리 모습이다. 온통 대부분 외래어 간판 일색이다. 옷가게도 'THE BODY SHOP' , 게임방도 'PC room' 등등 엄청나게 외래어 천국이다.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훈민정음 즉, 한글이 있는데도 한글은 쓰지 않고 외래어를 쓰는 건 이제는 대세인 듯하다. 옷가게 중에서 '미시패션' , 피아노 학원 중에서 ' 리틀 모짜르트' , 미용실 중에서 '헤어뱅크', 빵가게 중에서 '파리 바게트' 등……. 이런 간판들을 볼 때마다 우리말과 국화를 사랑했던 의사가 계셨던 '미국소아과'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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