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눈발속에서는
서정주 (1915 ~ 2000)
괜, 찬, 타,……
괜, 찬, 타,……
괜, 찬, 타,……
괜, 찬, 타,……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괜찬타,……괜찬타,……괜찬타,……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낮이 붉은 처녀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는 소리. ……
큰 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 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애기 작은 이애기들이 오부록이 도란그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산도 산도 청산도 안끼어 드는 소리. ……
미당 서정주는 한용운(韓龍雲)과 함께 불교에서 시적 영감을 얻은 대표적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초기 시에는 불교적인 달관이 거의 보이지 않고 억눌린 정신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지요. 이후 그의 시는 착란으로 치닫지 않고 절제와 달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가 발견해 낸 유일한 방법인 정신주의는 그를 삶의 현장에서 비켜서게 하고, 신비주의와 안일주의와 결합하게 만들었지요. 눈 내리는 겨울날 세상을 바라보는 노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요.
제가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김래원과 김정현이 주연했던 영화 '청춘'에서 입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좌절한 젊은이 둘이서 '괜, 찬, 타, ……괜, 찬, 타, ……' 이 시를 읊조리는 것을 보고 새삼 좋은 시가 주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겨울에 잘 어울리는 시입니다. 눈이 내리는 풍경 속에 서서 '괜찮다'라는 내밀한 눈의 소리를 듣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차분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온갖 미물들을 포용하면서 내리는 눈은 연신 '괜찮다'를 속삭이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네요. 제가 볼 때 이 시는 자연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크고 따뜻한 경지를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눈의 몸짓을 통해 인간이 황폐한 마음이 끝없이 정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하는군요.
이 시를 읽으면서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눈의 포용력과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괜찬타,……괜찬타,……괜찬타,……괜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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