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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겨울 낙동강 / 김여정

by 언덕에서 2012. 2. 6.

 

 

 

 

 

 

 

 

 

 

겨울 낙동강


                                      김여정 (1933 ~ )


 저녁 으스름 속에

 묵주를 든 산 앞에

 깊은 상처 가슴 깊이 숨기고

 비사(悲史)처럼 길게 누운

 낙동강아,

 아, 너였구나

 군청빛으로 빠져드는

 하늘에 사무치는 한(恨)

 너였구나


 오리 새끼들의 물발자욱조차

 건망증으로 깜박이는

 물속의 희미로운 불빛 서넛

 사랑은 뱃전에 찰싹이다 가버리고

 물보라의 고독

 바람의 항변

 아픈 능욕 뼛속 깊이 묻어두고

 나락처럼 아득히 누운

 낙동강아,

 아, 너였구나

 그토록 내가 찾아 헤맨

 고향의 핏줄은.


 -<어린 신에게>(민족문화사.1983)-



 


 

 고향의 자연은 누구에게나 남다른 추억이 배어있습니다. 어머니같이 아늑한가하면 또 다른 삶을 위해 떠나간 뒤 추억 속의 공간으로 자리하기도 하지요. <겨울 낙동강>의 시인은 이러한 고향의 강 앞에 서 있습니다.

 시인 앞에 한겨울 비어 있는 고향의 산과 들은 가득 채워진 다른 계절의 풍경보다 더 많은 의미의 울림을 가지고 있네요. 광막한 산야의 쓸쓸함은 고난스러웠던 기억의 한 자락을 상기시킵니다.

 시속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고향의 자연은 `상처'와 `한'의 기억을 안고 있는 듯합니다. 강은 고뇌를 깨우치려는 듯 소리 내어 흐르고 그 고뇌를 다스리려는 듯 산은 침묵하는군요. `묵주를 두른 산'이라는 표현에서 저는 시인이 바라보는 산하(山河)가 여느 산하와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황막한 산하와의 조우(遭遇)는 곧 아픈 기억과의 조우는 아닐까요? 어둑한 시간으로 잠겨드는 낙동강의 군청 빛은 아마도 묵묵히 흐르는 강이 보아온 한(恨)의 빛깔 같습니다.

 고향의 풍경이 시인에게 막막한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은 `고향'이 가지는 내면적 의미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고향은 객지를 떠돌다 돌아와 안식을 느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군요. 고향의 강이 담아내는 `오리새끼' `불빛' `사랑'의 단어는 고향의 공간을 아늑하고 따뜻한 곳으로 인지되도록 만들지 못합니다. 희미하게 깜박거리거나 언저리를 찰싹거리다가 사라짐으로써 막막한 쓸쓸함을 짙게 만드네요. 물보라의 고독과 바람의 항변이 산천에 묻힌 상처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풍겨오는 것임을 알아채고 고향을 간절하게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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