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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먼 사람에게 / 박목월

by 언덕에서 2012. 2. 13.

 

 

 

먼 사람에게

 

                                       박목월 (1916 ~ 1978) 

 

팔을 저으며

당신은 거리를

걸어가리라.

먼 사람아.

 

팔을 저으며

나는 거리를

걸어간다.

그 적막. 그 안도.

먼 사람아.

 

먼 사람아.

내 팔에 어려오는

그 서운한 반원(半圓).

 

내 팔에 어려 오는

슬픈 운명의

그 보랏빛 무지개처럼…….

 

무지개처럼

나는 팔이

소실한다.

 

손을 들어

당신을

부르리라.

먼 사람아.

 

당신을

부르는

내 손끝에

일월(日月)의 순조로운 순환.

 

아아

연한 채찍처럼

채찍이 운다.

먼 사람아.

 


 

시를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저는 이 시를 박목월 시인이 쓴 연시(戀詩)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별의 노래', '방문'과 같은 시의 연속선상에서 읽어야 하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화자는 오늘도 나는 팔을 저으며 거리를 걸어갑니다. 팔은 자동적으로 '반원'을 그으며 앞뒤로 흔들리는군요. 그런데 이 자동적인 동작에 그리움이 어리면, 그리하여 다른 곳에서 팔을 저으며 거리를 걸어갈 먼 당신을 떠올리면, 내 팔의 반원은 사랑의 반쪽을 잃은 슬픈 동선이 되는 장면입니다. 이제 ‘반원’은 단순히 팔의 궤적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사랑의 부재를 실감케 하는 형상이군요. 화자의 반원은 당신의 반원을 부릅니다. '먼 사람아' 하고.

‘내 팔에 어려오는/그 서운한 반원’에는 반원의 결여가 보랏빛 무지개처럼, 어느새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걸쳐져 있습니다. 먼 사람아, 그렇게 나는 서운한 결여를 호명으로써 메우는 게 아니라 결여를 존재처럼 확인하지요. 당신은 없습니다. 나의 팔은 당신에게 닿을 수 없군요.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씁니다.‘무지개처럼/나는 팔이/소실한다.’

 팔의 반원을 넘어 당신을 부르는 내 손끝에는 ‘연한 채찍’ 같은, ‘울음’ 같은 떨림이 진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부재가 진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해와 달의 순조로운 순환, 자연의 영원하고 완전한 원을 배경으로. 이 배경은 유한한 사랑, 결여의 통각으로 존재감을 얻는 사랑,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에 대비되는 신적인 무한함이자 완전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무한한 자연과 유한한 인간의 대조가 유한자의 슬픔을 치명적으로 키우거나 허무에 빠뜨리진 않습니다. 박목월 시인의 뒤에 남은 마지막 시집에 따라 말한다면 ‘크고 부드러운 손’ 속에서 나는 울고 있는 것이지요. 목월의 연한 울음은 일상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되지 않는 일상을 떨리게 합니다. 그리하여 일상은 문득 반짝이고 오늘도 나는 팔을 저으며 거리를 걸어갑니다. '먼 사람아' 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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