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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206

저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 작자 미상 저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작자 미상 저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오다가다 만난 사람이라고 또 한 번 저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저 그렇게 알았던 사람이라고 훗날 저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냥 한 번 기다려본 사람이라고 또 한 번 저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참았던 눈물 터트리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 2011. 8. 22.
참 우습다 / 최승자 참 우습다 최승자 (1952~ )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걸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위 시에는 “포르르”와 “흐르르” 사이에 터진 거품이 있습니다. 덜그럭거리는 틀니가 있구요. “포르르”가 가지에 앉는 산새라면 “흐르르”는 기침과 기침 사이에서 끓는 가래 같은 느낌을 주는군요. 새는 날아갔고 거품은 터졌는데 또 다른 기침이 쏟아져서 틀니가 빠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이 시인은 늘 사십대였지요. 그러나 신문은 이분을 .. 2011. 8. 15.
이 또한 지나가리 / 랜터 윌슨 스미스 이 또한 지나가리 랜터 윌슨 스미스 어느 날 페르시아의 왕이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슬플 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드는 물건을 찾아오라고. 신하들은 밤샘 모임 끝에 왕에게 반지 하나를 바쳤다. 왕은 반지의 글귀를 읽고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반지의 글귀는 이러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 슬픔이 밀려와 그대 삶을 흔들고 귀한 것들을 쓸어 가 버리면 네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 행운이 너에게 미소 짓고 기뻐할 때 근심 없는 나날이 스쳐 갈 때 세속에 매이지 않게 이 진실을 고요히 가슴에 새기라. '이 또한 지나가리.' - 신현림 엮음 중에서 139 곽경택 감독의 영화 ‘똥개’에서의 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형사인 아버지(김갑수)가 낯선 고아 소녀(엄지원)를 집에 데려오며 주인공(.. 2011. 8. 8.
여기를 저기로 삼고 / 김구(金逑) 여긔를 뎌긔 삼고 김구(金逑 : 1488~1534). 여긔를 뎌긔 삼고 뎌긔를 예 삼고져. 여긔 뎌긔를 멀게도 삼긜시고. 이 몸이 호접(胡蝶)이 되여 오명가명 하고져. ☞ 여기를 저기로 삼고 저기를 여기로 삼고 싶구나. 여기와 저기를 멀게도 만들었구나. 이 몸이 나비가 되어 왔다 갔다 하고 싶구나. 이 글을 쓴 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1488~1534)인 김구(金逑)로 그의 자는 대유 호는 자암입니다. 조선초기 4대 서예가의 한 분으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라고 부른다는군요. 저서에 이 있습니다. 작가는 생원과 진사의 양 장원이 되고 부제학이 되어 좋은 정치를 시도하였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0여 년의 유배 생활을 하였습니다.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부모가 돌아간 뒤였지요. 애.. 2011. 8. 1.
그늘 속의 탬버린 / 이영광 그늘 속의 탬버린 이영광(1965~ ) 지금은 그늘이 널 갖고 있다 그러니까 넌 빛이야 빛날 수 없는 빛 견디기는 했지만 스스로를 사랑한 적 없는 독신 너는 예쁘지 아니, 슬프지 탬버린이 울 때까지 탬버린은 그치지 않고 여전히, 검은 눈을 뜨고 있는 흑백텔레비전 텔레비전 그늘은 결국 인간.. 2011. 7. 25.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1913 ~ 1975)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바깥은 요란해도 아버지는 어린 것들에게는 울타리가 된다. 양심을 지키라고 낮은 음성으로 가르치신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다. 가장 화려한 사람들은 그 화려함으로 외로움을 배우게 된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집과 같이 거룩한 존재입니다. 집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곳에 주소를 두고, 이름을 적을 뿐 아니라,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이루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거지요. .. 2011. 7. 18.
수선화에게 / 정호승 수선화에게 정호승 (1950 ~ )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 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 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순결한 동심의 정서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 어느 문학평론가의 간명한 표현처럼 정호승은 '사랑'의 시인이지요. 눈사람처럼 순백한, 그래서 눈사람과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순도 높은 서정세계는 그의 시 곳곳에서 정감있게 펼쳐집니다... 2011. 7. 11.
연가(戀歌) 4 / 마종기 연가(戀歌)4 마종기(1939 ~ )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들꽃이 되어 이 바다 앞에 서면 나는 긴 열병 끝에 온 어지러움을 일으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망각의 해변에 몸을 열어 눕히고 행복한 우리 누이여. 쓸려간 인파는 아직도 외면하고 사랑은 이렇게 작은 것이었구나. - 시집 마종기 시인은 일본 도쿄 출생으로 아버지는 아동문학가인 마해송이며, 어머니는 한국여성 최초의 서양무용가인 박외선입니다. 이러한 부모로부터 문학적 자질을 물려받았으며 어릴 적부터 풍부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고 합니다. 그는 서울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시의 마이매미 밸리 병원에서 인턴, 오하이오 의과대학 방사선과 조교수 겸 방사선.. 2011. 7. 4.
인공호흡 / 김이듬 인공호흡 김이듬(1969~ ) 늙은 해녀와 술을 마시며 누가 만지면 제 몸을 잘라버리는 해삼 이야기를 해삼에 물회를 씹으며 듣는다 멀리 사지 비틀며 키스를 나누는 연인이 보인다 숙소로 기어올라와 나는 수족관에서 뻐끔거리던 생선처럼 머리를 비스듬히 눕힌다 숨이 가빠진다 인공호흡기가 절실한 중환자 하나 내 안에서 헐떡거린다 생채기 도려내고 촉수와 말단을 끊었으니 영혼은 어디로 들어오나 미역 줄기처럼 넘실거리는 머리칼을 물속에서 끌어당겨 누가 내 입술에 숨을 불어넣어주면 좋을 텐데 누가 만져주면 잘라낸 것들이 생겨날 것 같은데 난 속옷도 입을 새 없이 빠져나와 철 지난 해변의 저녁을 서성거린다 81 시인은 실연을 한 것일까요? 시를 읽으면 상상력이 풍부해지는데 이 시 또한 저를 상상의 세계 속으로 이끌고 갑니.. 2011. 6. 27.
무질서한 이야기들 / 진은영 무질서한 이야기들 진은영(1970~ ) “네 멋대로 자고, 담배 피우고 입 다물고, 우울한 채 있으려므나” 출처를 잃어버린 인용을 좋아해 단단한 성벽에서 떨어진 회색 벽돌을 좋아해 매운 생강과자를 좋아해 헐어가는 입과 커다란 발을 끊어져 흔들리는 철교의 빨갛게 녹슬어가는 발목 아래서나 썩어가는 두엄지붕들 위에서 저 멀리 평원에서 들소의 젖은 털 사이로 불어오는 달착지근하고 따스한 바람을 손가락으로 좋아해 아니라고 말하는 어려움을 모든 습작들을 좋아해 서툰 몸짓을 이사 가는 날을 좋아해 죽은 사람의 아무렇게나 놓인 발들의 고요를 그 위로 봉긋하게 솟은 공원묘지에 모여든 초록 유방들 산 자의 기침과 그가 빠는 절망의 젖꼭지를 좋아해 그러나 꿀과 눈이 섞이는 시간을 너의 얼굴에서, 목에서 허리에서 얼음 같은 .. 2011. 6. 20.
인생 / 최영미 인생 최영미 (1961 ~ )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 시집 - 이 시를 읽은 지는 20년 가까이 되는군요. 신문 문화면에 소개된 신간 기사를 보고 서점에 가서 이 책을 .. 2011. 6. 13.
풀 / 김수영 풀 김수영(1921 ~ 1968)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 2011. 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