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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방문 / 박목월

by 언덕에서 2011. 12. 12.

 

 

 

 

 

방문

 

 

                                           박목월 (1916 ~ 1978) 

 

--- 白髮이 되고, 이승을 하직할 무렵에 한번 더 만나보려니 소원했던 사람을 이제 방문하게 되었다.

덧없이 흐른 세월이여. 끝없이 눈발이 내리는구나.

 

 

 

그를 방문했다.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그를 방문했다.

내가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그는

집에 있었다.

하얗게 마른 꽃대궁이.

 

그는

나를 영접했다.

손을 맞아들이는 응접실에서.

 

그의 눈에는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이 어렸다.

나의 눈에도

눈발이 내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

 

차가 나왔다.

손님으로서 조용히 드는 잔.

담담하고 향기로운 것이

八分쯤 잔에 차 있다.

 

그를 방문했다.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하직했다.

하직맙시다.

이것은 동양적인 하직의 인사.

 

 



 

이 시는 목월이 말년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연시(戀詩)입니다.

 전에 소개했던 ‘이별의 노래’에서 목월의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요. 짐작컨대 이 시에 나오는 ‘그’는 목월의 첫사랑으로 보입니다. 오랜 세월 만나지 못하다가 백발이 성성해진 나이에,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인은 ‘그’를 만나러 갑니다. 하필이면 그날 눈이 내리는군요. 그의 집 응접실에 도착하니 화병에 꽂아둔 하얗게 마른 꽃이 눈에 띕니다. 하얗게 마른 꽃대궁이는 시든 꽃처럼 하염없이 늙어버린 화자(話者)와 상대방을 은유하고 있군요.

 집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립니다. 아, 쓸쓸하기 짝이 없는 재회이군요. 그의 눈에도 나의 눈에도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이 어렸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이라는 표현은 이루어 질 수 없었던 그들의 인연에 다름 아닙니다. 안타까운 것이지요. 노년에 만난 두 사람에게서 많은 대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어색하게 차를 마실 때의 분위기, 쓸쓸한 미소라는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직’이란 말을 사전에 찾아보면 ‘먼 길을 떠날 때 웃어른께 작별을 고하는 것’ 또는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설명되어있습니다. 박목월 시인이 시에서 사용한 ‘하직맙시다’ 라는 표현은 ‘작별하지 맙시다’ 는 뜻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동양적인 하직의 인사라니 무슨 뜻일까요? 기실 이제 우리는 작별하지만, 앞으로 지상에서 서로가 영원히 만날 일이 없겠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표현을 쓰지 않겠다는 반어법에 다름 아니군요. 눈 오는 날 생각날 법한 쓸쓸한 그림 같은 시여서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있었어요. 목월의 말년 일기장을 보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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