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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고향설 / 조명암

by 언덕에서 2011. 12. 5.

 

 

 

 

                                                                      고향설 (故鄕雪)                                   

 

                                                                                               조명암 (1913 ~ 1993)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일세
깁흔밤 날러 오는 눈송이 속에
고향을 불러 보는 고향을 불러 보는
젊은 푸념아

 

소매에 떠러지는 눈도 고향눈
뺨우에 흐터지는 눈도 고향눈
타관은 낫설어도 눈은 낫익어
고향을 외여 보는 고향을 외여 보는
젊은 한숨아

 

이 놈을 붙잡어도 고향 냄새요
저 놈을 붙잡어도 고향 냄셀세
나리고 녹아가는 모란 눈 속에
고향을 적셔 보는 고향을 적셔 보는
젊은 가슴아

 

 

 


  

위의 시는 1942년 4월에 가수 백년설(본명 ; 이창민)이 발표한 유행가의 노랫말입니다. 제가 아는 모 작가가 술만 마시면 이 노래를 불러대는 바람에 저도 이제는 가사를 줄줄 외울 정도네요. 백년설의 노래를 찾아보았으나 Daum에는 없어서 부득이하게 과거 악극단에서 가수생활을 했던 송해의 노래를 넣었습니다. 고국,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이 특히 좋아하는 이 노래는 월북작가 작품이라 후에 작사가 반야월이 개사하여 명맥을 이어 왔지요. 백년설이 오케에서 발표한 여러 곡 중에서 가장 알려진 노래가 아닌가 합니다. 노랫말을 만든 조명암이 월북 작가라 하여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간 공식적으로 들을 수도 없었고 자료마저 거의 없어져버린 옛가요 중의 하나이지요. 참고로 노랫말을 쓴 조명암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조명암은 충청남도 아산 출신으로 아버지가 일찍 사망한 뒤 어려운 가정 환경 때문에 금강산에서 불교승려로 있다가 1930년 만해 한용운의 추천을 받아 불교계가 운영하던 보성고보에 입학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1932년부터 시 작품을 발표하며 문필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4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창작과 작사가 활동에 들어갑니다. 1936년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여 수학했는데, 유학 중에 대중가요 가사를 발표하였고, 다수의 인기곡을 배출해 일제 강점기의 작사가로는 박영호와 쌍벽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의 가사는 섬세한 면이 돋보인다는 평들이 다수지요. 그의 인생 행적은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군요.

 그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예술계에서 친일활동을 하였고 광복 후에는 조선연극동맹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좌익 계열에 가담합니다. 그는 한국전쟁 중 우리와 적으로 맞섰고 북조선에서 고위직인 문화성 부상, 민족예술극장 총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 되었습니다. 〈꿈꾸는 백마강>, 〈신라의 달밤>, <선창>, 〈알뜰한 당신>, 〈목포는 항구다>, 〈화류춘몽>, 〈고향초>, 〈낙화유수>, 〈진주라 천리 길〉과 같은 일제 강점기의 히트곡들은 작사자의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지요. 1988년 월북 예술인들이 해금된 후에야 작사자가 조명암임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일제 시대에 고향을 잃고 추운 겨울날 방랑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상상하게 만드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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