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구문(屍口門) 밖, 봄
안현미 (1972 ~ )
착란에 휩싸인 봄이 그리워요. 비애도 회한도 없는 얼굴로 당신들은 너무나 말짱하잖아요. 착란이 나를 엎질러요. 엎질러진 나는 반성할까, 뻔뻔할까, 나의 죄는 가난도 가면도 아니에요. 파란 아침이고 시구문 밖으로 나가면 끝날 이 고통도 아직은 내 거에요. 친절하지 않을래요. 종합선물세트처럼 주어지는 생을 사는 건 당신들이지 나는 아니에요. 나는 착란의 운명을 타고난 빛나지 않는 별, 빛나는 별도 언젠가는 늙고 죽어요. 우리 모두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만 영원을 살 것처럼 착란 속에서 살며 비애도 회한도 모르는 얼굴로 우리들은 너무나 말짱해요. 착란에 휩싸인 봄이에요. 사랑 받을 수 있다면 조국을 배신하겠어요. 친구도 부정할 거예요. 전 세계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가 아니죠. 에디뜨 삐아프의 말이지만 그녀는 조국을 배신하지도 친구를 부정하지도 않았어요. 같은 이유로 나는 착란에 휩싸여요. 죽은 사람들만 불러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는, 시구문 밖, 봄 활짝 핀 착란이 그리워요.
-계간 『문학동네』2005년 여름호
봄은 계절의 주기로 볼 때 시작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세우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봄은 긴 겨울 동안 농사의 소출이 없기 때문에 식량 부족으로 시달리기 일쑤여서 이때를 ‘보릿고개’라 하였고 다른 말로는 ‘춘궁기(春窮期)’라고 하였습니다.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척 긴 것으로 느꼈으며, ‘봄떡은 들어앉은 샌님도 먹는다.’든가 ‘봄 사돈은 꿈에 봐도 무섭다. ’, ‘봄에 의붓아비 제사 지낼까.’ 등의 속담은 모두 봄의 궁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봄에 흔히 보게 되는 생리적 현상인 낮잠을 두고 생겨난 말로 ‘일장춘몽(一場春夢)’이 있는데, 이 말은 ‘덧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봄에 잠깐 낮잠을 이루었을 때 흔히 꾸게 되는 꿈은 덧없다는 뜻이지요. 또 봄이라는 계절이 기간으로 보아 짧기 때문에 덧없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또 봄은 오랜 겨울 동안 움추렸던 생리 현상을 활발하게 한다는 데서 유추된 생각이 ‘봄바람’, ‘춘정(春情)’ 등으로 나타나지요.
시인은 위의 시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요? 시구문(屍軀門)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입니다.
봄의 착란과 죽음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계절적인 봄이 인생의 봄인 사춘기의 격정적 충동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봄에는 들뜨기 쉽다는 경계가 담겨 있기도 하군요. 그러나 우리 모두를 진지함으로 몰고가는 봄이 활짝 핀 착란입니다. 무엇보다도 봄은 새로움·시작을 의미하고, 긴 동면 뒤의 깨어남ㆍ생동감, 봄의 온화하고 화창함을 생각하게 만들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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