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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바람의 검심 / 박순원

by 언덕에서 2012. 3. 19.

 

 

바람의 검심

 

                      박순원(1965~ )

 

 

술을 먹고 말을 타고 꾸벅꾸벅

졸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말이 옛 애인의 집에 다다랐다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팠으나

꾹 참고 지체없이 칼을 뽑아

말의 목을 내리쳤다

나는 말이 한 마리밖에

없었으므로 칼등으로 내리쳤다

나는 생명을 사랑했으므로

옛 애인은 반갑게 뛰어나왔다가

소리 없이 울기만 했다

나는 생명을 사랑했으므로

말이 한 마리밖에 없었으므로

너무 많이 취했으므로

가슴이 아파서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으므로

옛 애인은 이사를 했고

전화번호도 바꾸었다 그때

내가 칼날로 말의 목을 치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그 전에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한 것도 정말 잘한 일이다

 

 

 


 

 

 

 

위의 시를 읽으니 신라장군 김유신과 천관녀(天官女)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김유신은 다들 아실테고, 천관녀는 김유신이 살았던 동시대인 신라 진평왕 때의 기녀(妓女)로 알려져 있습니다. 천관녀(天官女)의 의미가 여자 무녀(巫女) 또는 여자 신관(神官)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천관녀는 소년시절의 귀족 자제인 김유신(金庾信)과 서로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안 김유신의 어머니가,

 “나는 이미 늙어서 밤낮으로 오직 네가 성장하여 가문을 빛내기만 바라고 있는데 너는 천관녀의 집에나 드나들고 있느냐.”

하고 울면서 책망하자, 김유신은 크게 뉘우쳐 다시는 그곳에 출입하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서약하였다지요.

 하루는 김유신이 술에 취하여 돌아오는데 말이 옛길을 따라 천관의 집으로 갔습니다. 천관은 한편 원망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반가이 맞이하였다지요. 그러나 천관을 보고 놀라 술이 깬 김유신은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도 버린 채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를 본 천관이 <원사(怨詞)>라는 원망하는 노래 한곡을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고 합니다. 뒤에 김유신이 그녀의 옛 집터에 절을 짓고 그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天官寺)라고 하였습니다. 이 절은 오릉(五陵)의 동쪽에 있었다고 전하지요.

 귀족의 아들, 김유신의 애마가 습관적으로 애인 천관녀의 집으로 향했다가 목을 베인 사건은 다 아는 전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머니 말씀 받들어, 정든 애인을 저버리고, 애마의 목을 단칼에 치고, 그렇게 효자가 되고, 영웅이 되었습니다. 매정하고 잔인해야 출셋길이 열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위의 시를 쓴 시인은 술이나 마시고, 하나의 생명체를 사랑한다고 칼등으로 목을 치는 흉내만 내고 있습니다. 어쨎든 시인이 하나밖에 없는 말의 목을 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입니다. 더 잔인해지기 전에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한 일도 잘한 일입니다. 역사 속에서는 애인의 대문 밖에 흥건 말의 피가 흥건했고, 하여 역사는 매정하고 잔인한 자를 편들었지만 시인이 시로 표현하는 문학은 따스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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