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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 / 김소연

by 언덕에서 2012. 5. 7.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

 

-선운사에 상사화를 보러 갔다

 

                                          김소연 (1967 ~  ) 

 

꽃이 지고 잎이 난다

꽃이 져서 잎이 난다

 

꽃이 져야

잎이 난다

 

할망구처럼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 본다

목덜미에 감기는 바람을 따라온 게 무언지는

알아도 모른다고 적는다

 

바다 위로 내리는 함박눈처럼

소복소복도 없고 차곡차곡도 없었다고

지금은 그렇게 적어둔다

 

꽃 지면 나오겠다는 악속을 지킨 걸지라도

꽃 피면 나오겠다는 약속을 어긴 거라고

오히려 적어둔다

 

잘했다고

배롱나무가 박수를 짝짝 친다

 

저녁밥 먹으러 나는 내려 간다

고깃집 불판 위 짐승의 빨간 살점을

양양 씹는다

 

 

 

- 시집 <눈물이라는 뼈, 민음사>

 

 

 

 

 

 

 

 



지난 주에는 봄비가 흠뻑 내리는 통에 꽃들이 수난을 당했습니다. 더 꾸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화려하던 수 많은 꽃들 태반이 고개를 떨어뜨리거나 땅바닥에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지요. 이제 화무십일홍 시간이 흘러가니 그나마 남은 꽃들도 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마음에는 안됐지만 계절은 이런 과정을 거쳐 바뀌는 것이지요.  시인은 첫머리에서 한층 냉정하게 계절과 삶의 이치를 짚어냅니다. ‘꽃이 지고 잎이 난다 / 꽃이 져서 잎이 난다 / 꽃이 져야 / 잎이 난다…’ 대부분의 봄철 식물은 먼저 피운 꽃이 ‘지고’도 아니고 ‘져서’도 아니고 ‘져야’만 잎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는 통찰입니다.

 더 시간이 흐르면 나무는 꽃을 놓치고 잎을 버리겠지요. 나무는 다 자란 후 다시 변형되어 태어나거나 어쩌면 재로 사라질 지도 모릅니다.

 내일이 어버이날이군요. 불현듯 30여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철도청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시던 저의 아버지는 틈만 나면 대패와 톱을 쥐고 집안일과 동네일을 하셨습니다. 병적으로 부지런한 분이셨지요. 연장통에는 아버지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었지만 어느 자식도 온전히 아버지를 읽지 못했습니다. 해질 무렵 드시던 소주 한 병이 유일한 낙이었을 겁니다. 땀내에 절은 옷과 신발은 버려지고 불에 태워졌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세 명의 아들을 당신보다 많이 공부하게 하고 윤택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드시고 가셨으니 실패한 인생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흘린 땀으로 저는 이렇게 끼니 걱정 않고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를 닮은 아들 얼굴을 생각해 봅니다. 꽃이 져야 잎이 난다는 싯귀가 가슴을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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