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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100

풋술을 마시다 풋술을 마시다 고교시절 절친이었던 내 친구는 대학에 들어간 후 연극에 미쳐있었다. 그는 수업도 듣지 않고 거의 매일을 학교 연극부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학교 내의 행사인 정기 연극공연 때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녀석 때문에 대학시절 보았던 &lt;.. 2013. 10. 18.
언제나 마음은 태양 언제나 마음은 태양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국어 선생님이 아프셔서 결근하시고 새로 부임하신 총각 선생님이 수업 시간을 메우게 되었다. 160cm가 될까 말까한 단구(短軀)에 단아한 얼굴을 한 귀공자 타입의 20대 후반의 젊은 선생님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얼굴은 영화배우 .. 2013. 10. 11.
아버지의 로맨스 아버지의 로맨스 아버님이 항상 부러워하는 고향 친구가 있었다. 그분이 결혼할 당시 신부 측에서 혼수를 많이 해오는 바람에 온 동네에 '굉장한 혼수'에 관한 소문이 자자하게 났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부러움은 어머님의 인내심을 자주 자극하고 있었다. 내용은 아버님 친구의 부인이 시집오면서 소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 자전거 한 대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혼수를 해왔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집안이 파산 상태였던 처가의 혼수와도 비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님는 매우 균형 잡힌 사고를 하신 분이셨다. '로마이 신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당시 경남 김해 지방에는 로마이 신랑 사건이 유명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좀 귀찮을 정도로 자주 들었다.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이.. 2013. 10. 4.
사라진 고향 사라진 고향 &lt;내외동의 연지공원. 내가 어릴 때는 연지못으로 불리던 곳인데 소먹이던 곳이다&gt; 내 고향의 행정 주소는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내동이었는데 그 지명은 근래에 김해시 내외동으로 바뀌었다. 할아버지는 제법 큰 농사를 지으셨는데 머슴을 셋이나 두었다. 큰 머슴, 작.. 2013. 9. 27.
눈뜨고 코 베어가다 눈뜨고 코 베어가다 1950년대의 국제시장 부농의 둘째 아들인 아버지와 스무살에 결혼한 어머니는 시댁인 경남 김해에서 손위 동서와 함께 시집살이를 하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셨는데 첫째인 일본에 유학 갔다 온 큰아버지와 그 아래 고모, .. 2013. 9. 13.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많은 분들이 오래전 이야기를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하는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나이가 드니 아침 나절 일은 잊어버려도 아주 어린 시절 일은 또록또록 생각이 난다. 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읽을 책이 없어서 장롱 속의 족보를 꺼내어 달달 외우거나, 엿장수 아저씨가 갖고 있는 낡은 야담류 책등을 독후감으로 적어 방학숙제로 제출하는 바람에 선생님께 야단을 맞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개신교 계통의 사학에 다니는 큰형의 책꽂이에서 란 기독교 중학교 교과서를 발견했다. 그 책은 구약성서 창세기부터 신약성서의 복음서까지를 중학생이 읽기 쉽게 풀어서 서술한 책이었다. 생각해보시라! 인류가 만든 책 중에서 구약 성경을 능가할만한 스토리 구조를 가진 대서사시가 있었던가? 나는 물.. 2013. 9. 6.
찍지 못한 졸업 사진 찍지 못한 졸업 사진 작년인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는 미국작가 ‘앤드류 포터의 소설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난 후 며칠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과거의 사건 하나가 계속 생각났다. 어린 시절의 작은 사건이 생각난 것이다. 행여 나의 철없는 행동에 상처받.. 2013. 8. 30.
유년시절 기억의 끝자락 유년시절 기억의 끝자락 내가 아주 어릴 때 어머니에게 손을 잡힌 채, 아니면 등에 업혀서 간 특정한 그 장소를 지금도 기억한다. 내가 세 살 정도일 때, 세탁소집의 아내로 가난에 쪼들렸던 어머니는 세탁소 일 외에도 수예(手藝)를 하고 있었는데 천주교 초량성당이란 곳에서 일감을 얻기 위해 코흘리게 어린아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신 것이다. 50년 가까이 지난 세월이지만 흐릿한 기억에 초량성당은 언덕 위에 있었고 성당 입구에서 본당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계단을 걸었던 것이 생각나곤 했다. 그 어린 시절, 그렇게 해서 마침내 도착한 성당에서 내려다 본 언덕 아래에는 부산항이란 커다란 부두와 도로, 기와집(적산가옥)들이 즐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3~4살 때 기억 말고는 .. 2013. 8. 23.
따뜻한 손 따뜻한 손 중2때의 일이다. 우리 집 뒤 작은 언덕에는 형관네가 살고 있었다. 형관이는 나보다 한 살 형이었고 학년도 한 학년 높았지만 어릴 적부터 이웃에 살다보니 친구로 지내던 사이였다. 형관이는 편모슬하에서 네 살 위인 형과 함께 세 명이 한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지금도 .. 2013. 8. 16.
그 누님들 지금은 뭘 할까? 그 누님들 지금은 뭘 할까? 조그마한 와이셔츠 회사의 공장장으로 월급 생활을 하던 30대의 아버지는 회사가 망하자 피난민들이 몰려살던 당감동(현재의 당감시장 아랫골목) 셋방으로 이사하여 세탁소를 차리셨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공장에서 익힌 다림질과 빨래 등의 기술로 살 길을 모색하신 것이다. 게다가 당감동에는 아버지의 누님인 고모가 동네에서도 아주 큰 방앗간을 운영 중이었는데 매형인 고모부가 뭔가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큰 돈벌이가 되지 못해 겨우 현상만 유지한 채, 윗동네인 동양고무라는 신발 공장 옆의 골짜기 땅을 60평정도 구입해서 방이 세 개인 쓰레트 집을 한 채 지으셨다. 그곳으로 이사를 갈 즈음에는 철도 공작창의 일용직 공무원으로 취직을 하셨다. 그곳에서.. 2013. 8. 9.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옛날의 생각에 이른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것이 있었다. 스승을 임금․부모와 동일하게 여겨왔다. 또한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할 만큼 우리는 교사를 존중해 온 것이다. 임금과 스승과 아비는 그만큼 중요한 존재였다. 요즘 비록 일각이긴 하지만, 무너진 사도(師道)하며 제자도(弟子道)를 생각할 때 이것 다시 씹어봄직한 말이다. 그래서 스승을 높여 일컬을 때는 ‘사군(師君)’이라는 말을 쓰고, 또 ‘사부(師父)’라는 말도 썼던 것이다. 임금과도 같고, 아버지와도 같다는 스승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수업 중에 책장사 아저씨가 교실에 들어왔다. 세계 대통령 위인 전집……. 박정희, 네루, 막사이사이, 닉슨, 링컨, 장개석, 드골, 처칠,.. 2013. 8. 2.
추억 속의 미숙이 추억 속의 미숙이 코흘리개 시절, 앞집에는 미숙이라는 동갑내기 소녀가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일로 기억한다. 동네에는 제법 큰 예배당이 있었다. 조영남의 노래처럼 동네에서 제일 큰 건물. 그 예배당 실내에는 어린이 놀이터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니스를 바른, 빛나는.. 2013.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