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마음은 태양
부산의 모 고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 청소년 문예지 '학원2(學園)'지의 문학상에 응모하여 ‘장원’ 상을 받게 되었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현. 동국대 문창과)에 특차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교수로 근무 중이던 서정주, 김동리 같은 기라성 같은 문인들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교사직에 몸을 담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부임한 곳은 경북 문경의 사립여자고등학교였다. 총각선생이어서 그랬는지 아침에 출근하면 교무실 책상 위의 화병에는 항상 꽃이 가득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그날은 화병에 꽃이 담겨있지 않고 대신 책상 위에 커다란 수박이 한 덩어리 놓여 있었다. 그때 함께 출근한 교사들이 그 수박을 보더니 "이게 뭐꼬? 시원하겠는데!"하며 주먹으로 수박을 "퍽!" 깨어서 나누어 먹는 바람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나이 어린 여학생이 1~2 시간을 걸어가며 등교가 가능한 거리에서 수박까지 들고서 여름날 얼마나 힘들게 등교를 했는데 그 수박을 한 주먹에 깨어서 먹어버리다니…….
그러나 시골 사립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직(職)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학교 재단 측에서 끊임없이 부당한 잡부금을 학생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유와 정의에 불타는 젊은 시인에게 용납될 수 있겠는가? 교직원 회의 자리에서 교장의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소리쳤다. "당신이 과연 교육자야? 부끄럽지도 않아!" 그 일로 사표를 쓰고 부산에 위치한 또 다른 사립학교 재단의 중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
이 정도의 이야기를 마칠 때 수업 종료 벨이 울리고 선생님의 "땜빵" 수업이 끝났다.
그로부터 3년의 시간이 흐른 고등학교 첫수업은 국어시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신 국어 선생님은 다름 아닌 중학교 때 '땜빵 수업'을 한 그 분이었다. 같은 사학재단(私學財團)이었기 때문에 2년 전에 이미 고등학교로 전보하여 와서 자리를 잡고 계셨던 것이다. 3년 전의 젠틀(gentle)한 귀공자 분위기는 이미 사라지고, 큼직한 몽둥이를 든 채 학생들을 응징하는 '별종 파이터(fighter)'로 변신된 상태였다. 선배들로부터 선생님 평을 들어보니 위압적이고 권위적인 수업 분위기, 참고서를 그대로 대독하는 듯한 고리타분한 수업진행으로 학생들로부터 '개성만 대단하고 실력은 별로인 교사'로 낙인을 받고 계셨다. 그러나 수업 시간 간간이 들려주셨던 문학과 문단이야기는 문학도(文學徒)였던 몇몇의 학생들에게는 나름대로 대단한 활력소가 되었던 것 같다. 서라벌 예대 동기생인 송기원 시인(당시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이었다)에 대한 교우담, 스승인 김동리. 서정주로부터 받은 가르침, 미모의 여류문인 강신재. 정연희 선생을 만났던 일 등을 이야기 해주셨던 것이 기억난다.
좌측 오정환 시인(1947 ~ )
일 년이 지난 고2 때였다. 국어 시간은 체육 시간 다음 교시로 편성되어 있었다. 몸이 약한 3학년 우수 학생들의 체력장 시험을 체육 선생님의 지시에 의해 (사실은 교장의 지시에 의해) 2학년 학생 중 튼튼한 친구 몇 명이 대신 치루고 있었다.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신문과 방송에 대문짝 만하게 다뤄질만한 기사감이겠지만 당시에는 관례였을 것이다. 예비고사에 체육 점수가 20점이나 배정되어 있고 공부를 잘하던 학생들은 대부분 몸이 허약했으니 체육 점수만 만점을 받는다면 그들의 S대 입학은 훨씬 수월해지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S대 입학생을 몇 명 배출했느냐는 학교 서열 평가의 척도였다. 그날도 '튼튼이' 몇 명이 ‘애교심(愛校心)’이라는 명목 하에 3학년 대신 턱걸이와 1000M 달리기 등을 하고 난 후 땀을 뻘뻘 흘리며 교실에 돌아와 국어 수업을 준비했다. 수업 시작 종이 울리고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의 표정은 비장했다. 땀을 흘리고 있는 친구들을 일일이 지적하시며 교단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6명 정도였을까? 선생님은 윗도리를 벗고 와이셔츠 소매를 거진 후 본격적인 '타작'에 들어갔다. 곳곳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유 없이 맞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지 않겠는가? 체육 선생님의 지시에 따랐을 뿐인데 이렇게 심하게 때리다니 말이다. 한 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는 무자비한 응징이 계속되었다. 지켜보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이 났다. 겨우 160cm가 될까 말까한 단구의 선생님이 180cm가 넘은 거구의 제자들을 타작하는 모습이 흡사 고목나무에 매미가 매달린 모습의 코미디 극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 학교에서 몇 년간 쌓은 선생님의 주먹 내공은 대단했다. 해당 학생들은 거의 묵사발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켜보던 학생들은 동료들이 맞는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들렸다.
♣
"어른들이 잘못하면, 너희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 거야! 젊은 놈들이 이렇게 썩어 있어도 돼? "
아, 나름대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그런 거구나. 선생님은 독재정권의 불합리함에 대하여 늘 통탄하셨는데 대학에 진학 후 모교 출신 운동권이 타 학교에 비해 유달리 많음은 (그게 좋던 나쁘던 간에) 선생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이 일정 부분 있었다고 생각된다.
며칠 후 실시된 기말고사에서 선생님이 출제한 문제가 애매해서 내가 이의(異意)를 제기했다. 여러 권의 참고서를 자세히 살펴본 후 선생님의 답안이 오답임을 조목조목 주장하며 나름대로 반기(反旗)를 든 것이다. 선생님은 처음에는 완곡하게 출제한 문제의 정당성을 주장하시다가 내가 끈질기게 오류를 입증해내니 또다시 고함을 치셨다.
♣
"맞다면 맞는 거지. 왜 말이 많아!"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0년 1월, 선생님은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었다. 신문을 보던 우리는 선생님이 이전에 그런 곳에 서너 번 당선된 줄 알고 있었던 바, 의아했다.
최근 내가 자주 가는 시내 중심지 뒷골목의 실비 맥주집의 벽에 걸린 표구된 액자에서 선생님의 시를 발견했다. 문인들이 자주 들른다는 그 술집 주인 아주머니의 이야길 들으니 일 년에 몇 번씩 그곳을 오시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 지상파 텔레비전의 지방 뉴스를 보다가 관변 시민단체의 자문위원에 위촉되어 잠깐 화면에 잡힌 노안(老顔)의 선생님을 발견했다. 흐르는 세월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 순간이었다.
- 1947년 부산 태생으로 198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 '맹아학교' '물방울 노래' '노자의 마을'을 펴냈으며 부산작가회의 회장, 부산민예총 회장을 지냈다. [본문으로]
- 나라 전체가 전란에 휩싸여 있던 1952년 11월에 대구에서 창간된 『학원』은 우리 나라 잡지 문화의 처음을 여는 고리였다. 전쟁으로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 대구로 피난온 서울 출판업자들이 감히 출판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하던 시절, 출판의 선각자였던 김익달(金益達)이 나라를 살리는 길은 청소년들을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잡지이다.1952년 11월 잡지 『20세기』를 게재하여 11월호로 창간하였다. 판형은 A5판. 발행인은 대구에 임시사무소를 둔 대양출판사 사장 김익달, 편집인은 하영오(河英吾)였다.6·25전쟁과 그 뒤의 혼란한 시기에 대중매체가 거의 없을 당시 청소년들의 정서순화와 학습활동, 여가 선용 등에 크게 이바지한 이 잡지는 장안의 종이 가격을 올릴 정도로 크게 환영을 받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많은 부수(10만 부)로 확장되었다.특히 『학원』에서 주관, 시상한 ‘학원문학상’은 20여 년에 걸쳐 매년 우수한 젊은 문학지망생들을 발굴, 양성하여 현재 중견문인으로 활약하는 사람만도 수십 명에 이르고 있다.그 밖에 『학원』의 수익금으로 발족시킨 학원장학회는 불우한 우수학생에게 장학혜택을 주어 정치·법조·교육·언론·기타 각계에 많은 중견명사들을 배출시키고 있다.그러나 이렇게 시대적 소명과 더불어 경영상의 성공을 함께 거두던 『학원』은 당시 불모지였던 청소년들의 꿈의 공간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그 뒤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휴간과 복간을 거듭하게 되었다. 현재는 학원사에서 그 판권을 소유한 채 휴간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학원 [學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0) | 2013.10.25 |
---|---|
풋술을 마시다 (0) | 2013.10.18 |
아버지의 로맨스 (0) | 2013.10.04 |
사라진 고향 (0) | 2013.09.27 |
눈뜨고 코 베어가다 (0) | 2013.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