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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풋술을 마시다

by 언덕에서 2013. 10. 18.

 

 

 

풋술을 마시다

 

 

 

 

고교시절 절친이었던 내 친구는 대학에 들어간 후 연극에 미쳐있었다. 그는 수업도 듣지 않고 거의 매일을 학교 연극부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학교 내의 행사인 정기 연극공연 때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녀석 때문에 대학시절 보았던 <우리 읍내>라는 연극을 기억하고 있다. 이 연극에서 지금도 내게 깊은 감동적 인상으로 남아있는 장면이 있다.

 

 

 여주인공이 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만다. 그녀는 무대감독을 맡고 있는 상징적인 신(神)에게 나는 이대로 젊은 나이에 죽을 수는 없다. 내 일생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한 번쯤 돌아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무대감독이 묻는다.

 “당신이 행복했던 것은 언제입니까?”

 여인은 대답한다.

 “내가 열 살 때의 생일이었어요.”

 소용없는 일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무대감독은 여주인공을 열 살 때의 시절로 되돌려 보낸다.

 장(場)이 바뀌면 열 살 때의 생일 아침이다. 어머니는 딸의 생일상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때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어머님이 저처럼 새파랗게 젊으실까.”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의 존재를 전혀 의식지 못하고 있다. 옆에서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고 있으며 옆에서 붙잡아 끌어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결국 여인은 행복했던 추억이란 과거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그처럼 아름답다 해도 되돌려 재현시킬 수 없다는 절대적 명제 앞에 깨끗이 과거의 미련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죽음에 승복하는 것이다.

 왜 갑자기 연극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가 하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립기 짝이 없는, 그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고2 때의 겨울방학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삼형제는 세살 터울로 내가 막내였는데 큰형은 국립대 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거제도에 있는 대기업 조선소에 근무하고 있었고, 공고를 졸업한 작은형은 울산에 있는 대기업 조선소에 제도사로 취직하여 야간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부모님들이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아들 형제들은 무난하게 사회의 중간층으로 편입되는 중이었다. 문제는 나였다. 고 1때 사춘기를 유달리 혹독하게 겪으며 방황을 많이 한 탓으로 학교성적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미술 공부는 가족의 반대로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며, 시인이 되겠다던 꿈 역시 스스로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게다가 성당에서 알고 지냈던 동년배 여학생과 주고받았던 연서(戀書) 사건은 스스로를 문제아로 만들어 자책의 구렁텅이 빠져드는 등 내 스스로도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안되겠다는 판단을 할 정도였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물을 가득 담고 그곳에다 흙을 넣어보시라. 당장은 흙으로 인해 흙탕물이 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흙은 바닥에 가라앉고 그릇 속의 물은 다시 맑아진다. 자기정화력(自己淨化力). 이 말은 자연현상에 사용되는 용어지만 인간사에도 적용된다. 고2로 넘어오면서 나는 평정심을 찾기 시작했고 무슨 일이던지 최선을 다하면 뭔가 길이 보일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그러니 아무 생각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바둑판처럼 정돈된 골목 길가의 내 창은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코피를 줄줄 흘려가며 공부를 했다. 연세가 들어 퇴역한 예비역 육군중령인 앞집 아저씨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동네 산책을 하시는 모양인데 그때까지 내 창에 불이 켜져 있음을 항상 발견하시고는 칭찬을 하셨다.

 “저 집 막내아들 공부하는 걸 보니 뭐가 돼도 큰 인물이 될거야!”

 그러던 어느 날,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저녁 어스름에 울산에서 부산으로 넘어온 작은형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야, 술집에 가서 우리 한 잔 할까?‘

 “형, 내가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술을 묵을 수가 있노?”

 형은 헐~ 웃으면서 말했다.

 “녀석, 세상에 안되는 일이 어디 있겠니?”

 그래서 둘은 부모님 몰래 집을 빠져나와 동네 시장통에 있는 한산한 막걸리 집에 도착했다. 당시 고등학생 머리인 스포츠머리를 한 나는 미성년자가 술집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형이 옆에 있기에 두렵지는 않았다. 형은 부침개. 튀김과 삶은 게, 회무침 등과 막걸리를 시켰는데 주인아저씨는 내가 고등학생인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안주와 술을 내놓았다. ‘풋술’이란 용어가 있다. 사전에는 없는, 남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낱말인 것 같은데 ‘처음 마시는 술’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풋술은 보통 남자들 주량의 서너 배는 된다는 것이 통설이고 보면 그날 내가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갈 ‘지(之)’자로 비틀거리던 나는 형과 함께 겨우 대문 앞에 도착했다. 대문 옆에 있는 벨을 누르면 집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어주는 구조였는데 그날따라 벨을 누르니 집안에 계시던 아버지가 마당을 가로 질러 대문까지 오셔서 손수 문을 열어주셨다. 순간 나는 당황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술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 숨을 멈추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금방 아들 둘의 상태를 알아채셨다.

 “이 놈의 자슥들! 너그 술 묵었제? 어린 나이에 술 묵으면 머리 나빠지는 거 모르나!”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왠지 대견해하시는 표정이었다. 나는 곧장 방으로 달려가 요를 깔고 잠들었다.

 

솔솔 부는 봄바람

쌓인 눈 녹이고

잔디밭엔 새싹이

 파릇파릇 나고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우리는 그 집에서 살았다. 밤이 오면 세든 뒷집의 어린 아이들이 우리 가족(세살 터울인 형들과 부모님) 앞에서 소프라노와 알토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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