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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by 언덕에서 2013. 9. 6.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많은 분들이 오래전 이야기를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하는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나이가 드니 아침 나절 일은 잊어버려도 아주 어린 시절 일은 또록또록 생각이 난다. 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읽을 책이 없어서 장롱 속의 족보를 꺼내어 달달 외우거나, 엿장수 아저씨가 갖고 있는 낡은 야담류 책등을 독후감으로 적어 방학숙제로 제출하는 바람에 선생님께 야단을 맞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개신교 계통의 사학에 다니는 큰형의 책꽂이에서 <성경이야기>란 기독교 중학교 교과서를 발견했다. 그 책은 구약성서 창세기부터 신약성서의 복음서까지를 중학생이 읽기 쉽게 풀어서 서술한 책이었다. 생각해보시라! 인류가 만든 책 중에서 구약 성경을 능가할만한 스토리 구조를 가진 대서사시가 있었던가? 나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약 100번 가량 읽었을까? 선천적으로 암기력이 좋은데다 읽을 책이 그 책밖에 없었으니 몇 달 동안 계속 읽다보니 구약 성서와 신약성서 중 복음서를 달달 외우는 수준까지 갔던 것이다.

 

 네 살 때 유아영세를 받았으나 어머니가 냉담(冷淡)하는 바람에 성당에 다니지 못했던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학급 친구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오후 2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한 시간은 교리공부고 나머지 한 시간은 어린이 미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두 시간은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꿈이 없던 소심한 소년은 드디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세상을 향한 자신감을 채우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성당에서 실시하는 수십 번의 각종 교리시험에서 나는 한번도 빠짐없이 만점을 받았고 상이란 상은 혼자서 싹쓸이 했기 때문이다. 6학년 담당 주일학교 선생님은 그러한 나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장미꽃이 만발한 4월 어느 토요일 오후, 성당교리실에서 스무 명 가량의 남녀 아이들이 눈을 빤짝이면서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영화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덧니가 유달리 기억나는 선생님은 20대 중반의 키가 크고 글래머 몸매를 한 미인이었는데 항상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셨다. 선생님은 그날 성경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기적>이란 영화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하셨다. 5분 정도 늦게 지각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비어있던 선생님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선생님 몸에서 풍기는 향긋한 체취와 향수 냄새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여자 형제 없이 자란 가정환경의 영향도 있었겠으나 孟春, 날씨가 너무 좋았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여름방학 때 우리들은 선생님과 함께 부산의 가장 구석자리에 위치한 다대포 해수욕장에 소풍을 갔다. 선생님은 점심도시락과 버스비만을 준비해오라고 했는데 실제 해수욕장에 가니 비치 파라솔 등을 빌리지 않고 해수욕장 구석 외진 곳을 찾아서 걷고 또 걷는 것이 아닌가? 탈의장과 파라솔 업을 하는 젊은 남자들이 우리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선생님, 이리 와여!”

 “이쁜이 선생님! 잘해 드릴깨여!”

 선생님은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고 인적이 드문, 외진 모래사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평상복 차림의 선생님은 바위틈으로 들어갔다 나왔는데 갑자기 빨간색 비키니 차림으로 변신했다. 이 후 선생님은 자비로 대형튜브 한 개를 빌려서 일일이 아이들을 자신의 품에 안고 물놀이를 하셨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비쩍 마른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등에 부드러운 선생님의 품이 느껴지는데 사춘기가 시작하는 시기였는지 순간 나는 좋아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선생님은 내 귀에 대고 고운 목소리로 "집에 누나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형만 둘 있어요."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6시경에야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차가 막히는 바람에 귀가시간이 너무 늦어 통금시간인 12시 가까이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들 부모님들이 경찰서에 <아동 실종신고>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몇몇 부모님은 성당의 주임신부님께 항의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쨌든 그 리버럴하고 예뻤던 선생님은 그 일로 징계를 받았는지 그날 이후 주일학교에서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후임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대답이 너무 간단하여 더 이상의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서울 갔다!"

 그렇게해서 그해 여름이 가고,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 고등학교에 가고 또 어른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이성을 사귀게 되었다. 성인이 된 후 돌이켜 보면 그간 내가 이성을 바라보는 기준이 그때 그 선생님과 연관되어져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가끔씩 내 자신, 행복에 관한 천부적인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좋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만져지지 않는다고 굳이 부정해야 할 이유도 없다. 나에게는 늘 세 가지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해줄 누군가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선생님이 그 누군가가 아니었을까? 나는 당시 정리정돈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일에는 천치지만, 늘 비현실적인 즐거움을 원했다. 어렸을 때 꿈꾸었던 프루스트적인 웅장함을. 그러나 한편으로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그 그리움과 동경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불혹의 사십이 지난 어느 날 그 선생님을 찾아서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니 그때 교리실에 함께 있던 꼬맹이의 큰누나와 그 선생님이 친구였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술을 무척 좋아하는 그 친구를 퇴근 무렵 시간에 불러서 통사정 투로 이야기했다.

 “철수야, 그 선생님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한 번 연락처를 수소문해 주면 안되겠니?”

 “아하, 그렇구나! 그렇게 하자. 그 당시 내 누나와 선생님이 친한 사이였으니 누나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이후로 건망증 심한 친구에게 몇 번이나 닦달을 하였다. 그리고 두 달 후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에게 물어보았다……. 그 선생님, 우리에게 교리 가르칠 때가 대학 4학년 때였는데 이후 결혼하려고 미국 갔다가 L. A 공항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카더라…….”

 아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한숨만 연거푸 쉬다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데 궁금하다. 이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내가 수십 년간 선생님을 향해 가졌던 감정,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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