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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눈뜨고 코 베어가다

by 언덕에서 2013. 9. 13.

 

 

눈뜨고 코 베어가다

 

 

 

1950년대의 국제시장

 

 

 

부농의 둘째 아들인 아버지와 스무살에 결혼한 어머니는 시댁인 경남 김해에서 손위 동서와 함께 시집살이를 하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셨는데 첫째인 일본에 유학 갔다 온 큰아버지와 그 아래 고모, 아버지, 삼촌 순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의 농사일을 돕고 있던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징집되어 함흥전선으로 떠났고 이후 영천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했다.

 어머니의 친정인 외가는 한국전쟁의 결과로 그야말로 빈궁하기 짝이 없는 한미한 집안이었다.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던 외할아버지 집안은 아들들이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됨에 따라 몰락해갔다.

 

 외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진주농업학교(현재 국립경상대학교 전신)를 나온 외삼촌 둘은 일제시대 때부터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지식인들이었다. 큰외삼촌은 남로당 경남도당 간부였고 작은 외삼촌은 김해군당 간부였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해방전쟁이라 믿고 있던 그야말로 순진한 혁명가였던 걸로 판단된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를 꿈꾸었던 한 집안은 북한의 남침실패로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국군과 미군이 반격하여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38선을 넘게 되자 남한의 남로당 세력들은 된서리를 맞게 되고 두 외삼촌은 각각 산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후폭풍으로 이른바 보도연맹사건1이 터진 것이다. 이후 큰외삼촌은 마을 뒷산에 토굴을 파고 숨어 지냈으나 작은 외삼촌은 우익에게 체포되어 임시재판 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16세의 어린처녀인 어머니는 수없이 많은 시체더미 속에서 작은 오빠를 찾아내었다고 회고했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자 큰외삼촌은 사상전향을 선언하고 수형생활을 2년 한 후 풀려났다. 이 와중에 외할아버지는 충격으로 사망했고 제법 살던 외가는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대략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던 나는 나림 이병주 선생이 쓴 <지리산>과 <관부연락선>이라는 소설을 읽고 외삼촌들의 활동내용을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경남지역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행적에 대한 스토리가 주된 이들 작품에서의 등장인물은 모두 실명으로 처리되고 있는데 두 책 속에서 외삼촌들의 활동내역과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경남 김해군 가락면에서 식자 중의 식자였던 큰외삼촌의 전향 후 삶은 평탄치 않았던 모양이다. 고문의 후유증인지 술 때문인지 한국전쟁 이후 10년을 힘겹게 버티다가 7명의 자녀를 외숙모에게 남긴 채 4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외삼촌이 슬하에 둔 자녀 (그러니까 나의 외사촌들이다) 5남 2녀의 삶들도 힘겹긴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에서야 겨우 없어진 ‘연좌제’ 때문에 변변한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고 그들 모두 한결같이 변두리의 이방인으로 힘든 삶을 살았는데, 외사촌 첫째형은 월남전 고엽제 후윳증으로, 둘째 형은 알콜중독으로 인한 간경화로 30대에 사망했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대개의 경우처럼 자신의 소유한 대부분의 전답을 큰아들에게 상속하고 자투리 땅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분가를 명했다. 그때 어머니는, 어찌나 기쁜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부산 연지동에 위치한 와이셔츠 공장에 취직했다. 어머니는 당시의 기준으로는 매우 큰 키와 미모의 보유자였다. 그러다가 신혼 2년째 되던 해,아버지가 이혼을 결심할 정도의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1954년도 중반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촌구석 하구의 시골동네에서 거의 20년을 자라다가 부산에서 신혼살림을 살게 된 어머니 입장에서는 부산이라는 대도시의 모든 것이 신기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면 짬을 내어 부산시내 구경을 다니시기 시작했다. 6.25 전쟁 이후 부산의 명동이라고 할 중심지는 어디였을까? ‘굳세어라 금순아’로 유명한 바로 국제시장이다.

 지금은 일본인들의 관광지로 유명한, 자갈치 시장 건너편의, 국제시장은 광복과 더불어 귀환동포들이 생활근거지로 모여들어 터를 잡고 노점을 차림으로써 시장으로 형성되었는데 동란의 혼란 속에서도 이 시장은 활황을 누렸다. 원조물자·구호품·군용품이 절대부족상태의 민간소비용품과 함께 유통되었고 속칭 ‘양키시장’ 같은 곳에서는 외제품이 판을 치는 '부산의 명동'이었다.  

 

 

<어머니 친정인 낙동강을 배경으로 찍은 처녀시절 사진>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시골색시가 국제시장 이곳저곳을 구경하니 모든 게 재미있고 신기했을 것이다. 그때 전차정류장에서 아주 커다란 보따리를 든 어떤 점잖게 생긴 귀부인이 새댁에게 말을 걸어왔다.

 “새댁, 나는 국제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인데 잠시만 도와주면 안 될까요?”

 “뭔데요?”

  잠깐 건너편 상점에 물건을 사야 되는데 5분만 이 보따리를 지켜주면 내 후사하리다.”

 다음 전차가 올 시간이 20분이나 남았는지라 흔쾌히 어머니는 수락했다.

 “그러세요. 빨리 오세요.”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새댁, 이 보따리에 든 물건이 수백만 원 어치거든……. 혹시 해서 그러는데 새댁이 끼고 있는 그 금가락지를 내게 맡겨주면 내가 안심하고 다녀올 것 같은데…….”

 비싼 물건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맡기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시골 새댁은 대번에 결혼 금반지를 빼어주었다. 

 하하,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준 분들은 대충 짐작하실 것이다. 이십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그 중년부인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대형 보따리를 열어보니 똘똘 말아놓은 쓰레기 신문지가 가득했다. 그때야 새댁은 아하, 눈뜨고 코 베어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참담하게 깨달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참으로 순진한 분이었다. 신혼 혼수로 받은 금반지를 미련하게 빼앗긴 사건처리조차 매끄럽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저녁에 퇴근한 아버지에게 그날 일어난 일을 이실직고를 한 것이다. 참으로 난감했을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단호하게 결심하신 것 같다. 그제야 사안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님을 어머니는 알았지만 또 순진한 면이 있어서 남편의 명을 존중해 짐을 싸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한 시절, 거물 공산주의자였던 외삼촌은 친정으로 쫓겨 온 여동생에게 물었다.

 “너 어인 일로 보따리 싸서 집에 왔노?”

 “신랑이 쫓아내데예…….”

 “무슨 일이 있었노?”

 어머니는 외삼촌에게 자총지종을 이야기했고, 가만히 듣던 외삼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니 남편이라도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외삼촌은 사태를 어떻게 해서라도 수습해야한다고 절감했는지 빚을 얻어 김해읍내에 있는 금방에 가서 똑같은 반지를 구입하셨다. 그리고 여동생에게 다시 짐을 싸게 한 뒤 함께 부산행 버스에 올랐다. 이후 이야기는 다들 짐작하실 것이다. 이후에 나를 포함한 아들 삼형제가 태어났으니까……. 하하,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그 일 이후로 지나치게 앞뒤 경우를 따지기 시작했던 어머니는 눈뜨고 코 베어간 국제시장이 세상물정을 알게 된 좋은 계기였음을 자주 이야기했다.

 

 

 

 

 

  1. ☞보도연맹 사건 : 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즉결처분을 단행한 사건.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10월 좌익전향자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으로서, 좌익세력에 대한 통제와 회유를 목적으로 했다. 49년 말까지 이 조직에 가입된 수는 무려 30만 명에 달했으며, 서울의 맹원수는 19,800여 명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경찰은 초기 후퇴과정에서 이들 보도연맹원에 대한 무차별 검속·즉결처분을 단행했다. 50년 7월 21일 경북 문경군 호계면 별암리의 경우 주평 앞산에서 2백여 명, 영순면 포내마을 뒷산에서 3백여 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이같은 일은 평택 이남의 전지역에서 발생했으며, 한국전쟁 중 벌어진 최초의 집단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는 또한 북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났던 좌익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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