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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추억 속의 미숙이

by 언덕에서 2013. 7. 19.

 

 




추억 속의 미숙이

 

 

 


 

코흘리개 시절, 앞집에는 미숙이라는 동갑내기 소녀가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일로 기억한다.

 동네에는 제법 큰 예배당이 있었다. 조영남의 노래처럼 동네에서 제일 큰 건물. 그 예배당 실내에는 어린이 놀이터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니스를 바른, 빛나는 마루 바닥이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옆집 친구 병호랑, 미숙이, 그리고 나해서 세 명이 그곳에 자주 놀러갔다. 어느 날 세 명이 함께 노는데 유독 미숙이랑 내가 친하게 노니 갑자기 병호가 샘이 났는지 먼저 나가버렸다. 이후 미숙이랑 둘이서 놀다가 집으로 가려고 신발장에서 신발을 찾으니 내 고무신이 없는 것이었다. 신발을 잃어버렸다! 갑자기 엄마의 빨래 방망이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아들만 세 명을 키우면서 빨래 방망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셨다. 나는 갑자기 막막한 마음이 되어 울음을 터트렸다. 고무신 한 켤레 때문에 울음을 터트리다니 좀 과장이 심한 게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고무신 한 켤레는 쌀 한 되 가격으로 일 년을 신어야 하는 고급 소비재였다. 미숙이는 울고 있는 나를 달래면서 침착한 말투로 우선 자신의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 내 신발을 찾아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미숙이의 조언대로 미숙이의 신발을 신고 교회 문을 나와 보니 내 고무신이 교회 화단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게 아닌가. 짐작컨대 병호의 질투 어린 소행이었고 미숙이는 안절부절 못하는 내게 어른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아침 등굣길에 미숙이와 친구들을 만나서 여럿이 함께 학교에 가게 되었다. 겨울날이었는데 강한 바람이 불어 미숙이가 쓰고 있던 빵모자가 개울가에 떨어져 버렸다. 2M정도의 높이였을까. 아무도 미숙이의 모자를 건지려 하지 않아서 내가 두꺼운 얼음이 언 개울로 점핑 하듯 훌쩍 뛰어내렸는데 미숙이는 ‘으악!’하며 고함을 질렀다. 모자를 건져 미숙이에게 전해주는데 미숙이는 놀란 탓인지 울고 있었다. 싸구려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핫하, 그렇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공부를 그다지 못하지는 않았는지 중학교 졸업 후 나는 인문계 고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미숙이는 중위권의 여상으로 진학했다. 바로 앞집에 살던 미숙이는 그리 멀지 않은 뒷동네로 이사 갔다. 그래도 길에서 만나면 반가운 친구였다.  고교 평균화 이전에는 별 볼일 없는 사립고교였던 우리 학교는 평균화를 기화로 대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그 결과로 평균화 이전 부산. 경남지역의 명문고인 경남고, 부산고를 필적하는 대학 합격률을 기록했다. 그런 학교 분위기 때문에 고교 1학년 때부터 저녁 열시까지 야간 자습을 하는 바람에 밤늦게 하교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리 학교는 도시의 중심에서 3~40분 거리 떨어진 외곽의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버스를 타는 서면에 가기 위해서는 교문에서 정류장까지 30분가량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걷다 보면 부산의 명동이라는 서면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가량 가다 보면 집이 있는 동네로 도착한다. 문제는 부산의 명동이라는 서면 그 동네 때문에 미숙이와 헤어지게 되었다는 거다. 서면이라는 동네는 지금도 그렇지만 밤이 되면 거대한 공룡 같은 유흥가로 변한다. 철들지 않은 중고생들도 밤이 되면 그곳에 나와서 괜히 하릴없이 서성거렸고, 그들을 위한 ‘빵집’같은 전용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곽경택의 영화 '친구'에 나오는 그런 분위기를 상상하면 된다. 지금은 맥도날드나 콜라텍 등이 그런 역할을 하겠지만.

 여남은 명의 친구들과 집에 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내 어깨를 툭 쳤다.

 “혁이!”

 옆을 보니 미숙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밤 열시 반, 교복 차림으로 하교하는 미숙이가 아니고 지나치게 몸에 딱 들어붙는 백바지에 빨간 블라우스, 얼굴에는 화장까지 한 미숙이라는 점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날라리’ 모습으로 미숙이가 서면에서 나를 아는 척 했으므로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이유 없이 창피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모르는 척 외면해 버렸다. 미숙이는 그런 내 모습에 실망을 했는지 즉시 자리를 떠나버렸다. 미숙이는 학교에 다니면서 저녁이면 불량소녀가 되어 싸돌아 다녔던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추측이었을 뿐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미숙이를 만난 적이 없다. 내가 대학 1학년 땐가 ……. 직장에 다니던 큰형이 서면의 모 주점에서 미숙이를 보았다고 했다. 어느 남자와 미숙이가 술 마시는 걸 목격했는데 어찌나 교태가 심한지 보기 민망했다는 표현을 했다. 미숙이는 왜 그랬을까?

 결국 나는 미숙이에 대한 우정을 고스란히 자신의 내부에 남겨둔 채 철딱서니 없이 세워놓은 규율 속에서만 그녀와 헤어진 것이었다. 그 철없음은 사람이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 되는가를 알지 못한 시기였다.


 3년 전, 등산하다 무리하여 발목을 삐끗하는 바람에 한의원에 간 적이 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고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할머니의 부축을 받고 대기실에 들어왔다. 두 분을 보는 순간 미숙이 아버지와 어머니인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어, 두 분은 내 부모님보다 10년 이상 연배이신데 아직 살아계시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니 두 분 모두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 분은 치매 끼가 있고 또 한 분은 귀가 어두우신 거다. 침을 맞고 한의원을 나오면서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생각났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미숙이를 그리워 하지도 않았고,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았으며, 잊으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철없던 시절 내 행동이 여상 다니던 미숙이에게 자괴감을 준 것은 아닌지 늘 미안할 뿐이다. 혹시 미숙이를 다시 만난다면 고 1때 길거리에서 몰라본 척 했던 일을 사과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