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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

by 언덕에서 2012. 10. 15.

 

 

 

 

무등(無等)을 보며

 

                   서정주 (1915 ~ 2000)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 [현대공론](1954년 8월호)-

 

 

 


 

 

이 작품은 미당이 6·25전쟁 직후 광주 조선대학에서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며 교수생활을 하던 시절, 물질적․정신적인 허기를 달래며 쓴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맷빛(진 초록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산'처럼, 한낱 가난 때문에 우리들의 본질이 남루해지지는 않는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무릎 아래 지란(향초)'을 기르는 무등산처럼 우리들도 자식들을 기르며, 부부의 정을 나누며 살아가다가 달관과 여유로운 자세로 인생의 오후를 받아들이자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가시덤불 속에 뉘어질지라도 옥돌처럼 호젓하게 묻혔다고 위안을 삼자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세사에 시달리면서도 짐짓 세상을 관조(觀照)하는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어 나이가 든 후에 읽으니 참으로 좋습니다.

 6·25전쟁으로 인한 광주에서의 피난 생활은 인정이 메말라 허기지고 고달픈 삶이었는데 시인은 무등산을 묵묵히 바라보며 자신의 생활 철학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주고 있군요.

 산은 시인에게 의인적인 형상으로 보입니다.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맷빛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산을 바라보며 시인은 헐벗은 자신의 처지를 차라리 떳떳하게 생각합니다. 가난이란 한낱 우리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이어서, 가난할수록 허릿잔등이 드러나듯이 우리의 '타고난 마음씨'는 오히려 빛나는 것이 된다고, 인간의 본질이 물질적인 궁핍으로 인하여 찌들기는커녕 오히려 그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푸른 산이 그 기슭(산 아래)에 향초(香草)를 기르듯이, 아무리 궁핍하더라도 우리는 슬하(무릎 아래)의 자식들을 소중하고 품위 있게 기를 수밖에 없다는, 의연한 긍정의 자세를 취합니다. 참으로 인간을 찌들게 하는 것은 물질적인 궁핍이 아니라 정신적인 빈곤이라는 생각이, 배고파 허기진 오후의 한때에도 차라리 한 부부를 갸륵한 사랑 속에 있게 하며, 죽음(가시덤불 쑥구렁) 속에서도 옥돌처럼 묻혔다고 생각하게 하는군요.

 시는 인격이라는 말이 있지만, 궁핍 속에서도 높은 정신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인격이 시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빈곤이 참으로 자신의 현실 문제가 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시인의 순응주의적 태도와 극단적인 정신주의가 오히려 있는 자의 사치로 보일 우려가 없지 않을 것 같군요.

 이 시는 높은 예술적 승리를 보인 작품입니다. 군더더기가 없는 시어, 말쑥한 시경(詩境)이 가을 하늘처럼 투명하게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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