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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여름이 가다 / 노향림

by 언덕에서 2012. 9. 3.

 

 

 

 

여름이 가다

 

                                    노향림 (1942 ~  )

 

만날 사람도 없이 긴 나무의자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불콰하다.

 

닫힌 얼음집 앞에 빚더미처럼

여름이 엎질러져 있다.

 

문 안에서 누가 톱질을 하는지

새벽에서 밤까지

슬픔들이 토막으로 잘려나오는 소리.

질이 연한 내 마음이 아프다.

 

쭈쭈바를 입에 문 아이가

기웃거리다 지나가는 쪽

속이 편안한지, 덜컹거리며 가야 할 길 버리고

시동 걸린 화물트럭이 빈 채로 대기중이다.

 

큰길 옆 버즘나무 그늘 밑

사람들이 얼굴을 펴면 뜨내기 꽃들의 얼굴에도

햇볕이 환하게 빛났다.

 

몰래 내다 버린 화분 속에

관절을 앓는 남천이, 은침을 박고 있는

어깨와

겨드랑이에

여름이 환하게 지는 중이다.

 

 

 

- 시집『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년 창비

 

 

 


 

초특급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그러고 나니 여름은 떠나가고 있네요. 모래알처럼 많은 인파가 바닷가를 찾았고, 주렁주렁 줄지어 산을 찾았던 그 여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밀물처럼 출렁이고, 버드나무처럼 흥청거리던 여름, 가마솥처럼 부글부글 끓던 날씨도 떼 지어 흘러가던 뭉게구름도 모두 지나갑니다.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가깝던 선풍기도, 겨울보다도 더 시원한 에어컨도 변덕스러운 사람을 나무라는 것만 같습니다. 춘향의 절개와 견주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푸름을 자랑하던 나뭇잎들도 새 옷으로 갈아입을 차비에 바쁠 시기입니다. 쥬리엣의 마음처럼 뜨겁던 태양이, 아스팔트를 녹아내리게 하던 그 태양이, 돌아서 떠나버린 이의 마음처럼 식어버리겠지요.

 여름은 쉴 새 없이 흐르는 강물, 굽힐 줄 모르는 대나무일 거라고 생각했지요. 백리 길을 달려온 마라토너처럼 가쁜 숨을 내쉬어야 했고, 비 오듯 흐르는 땀방울을 옷으로 받아내야 했던 여름은 안녕이란 인사도 없이 이제 작별을 고하나봅니다.

 저녁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날은 아직 깜깜해지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당신을 잊고 지낸 동안이 내내 여름이었군요. 남은 해가 아까워서 나는 주차장 한 편에 있는 작은 분수대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내가 갈 때마다 분수는 이미 멈춰 있지만 그것 때문에 고요하고 적막하여 좋습니다. 물빛은 아주 하늘색입니다. 물빛이 고와 보이는 것은 작고 네모난 시멘트 분수에 하늘빛 페인트가 칠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고운 물빛이 시멘트에 칠한 색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 멀리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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