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전설
조향(1917 ~ 1985)
하얀 종이 조각처럼 밝은 너의 오전의 공백(空白)에서 내가 그즘 잠시를 놀았더니라 허겁지겁 하얀 층층계를 올라버린 다음 또아리빛 달을 너와 나는 의좋게 나눠 먹었지 옛날에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고대(古代)의 원주(圓柱)가 늘어선 여기 내 주름 잡힌 반생을 낭독하는 청승맞은 소리 밤이 까아만 비로오드의 기침을 또박또박 흘리면서 내 곁에 서 있고 진흙빛 말갈(靺鞨)의 바람이 설레는 하늘엔 전갈이 따악들 붙여 있다 참새 발자국 모양한 글자들이 마구 찍혀 있는 어느 황토 빛 영토의 변두리에서 검은 나비는 맴을 돌고 아으 다롱디리! 안타까비의 포복(匍匐)이 너의 나의 육체에 의상(衣裳)처럼 화려하구나 나는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에서 마지막 피를 흘린다 나의 손바닥에서 하얀 네가 멸형(滅形)하고 나면 물보라 치는 나의 시커먼 종점에서 앙상하게 걸려 있는 세월의 갈비뼈 사이로 레테의 강물이 흐른다 나는 검은 수선꽃을 건져 든다 쌕스폰처럼 흰 팔을 흔드는 것은 누굴까! 팔목에 까만 시계줄이 감겨 있다 인공위성 이야길 주고 받으면서 으슥한 골목길로 피해 가는 소년들의 뒤를 밟아 가니까 볼이 옴폭 파인 아낙네들이 누더기처럼 웃고 섰다 병든 풍금이 언제나 목쉰 소리로 오후의 교정을 괴롭히던 국민학교가 서 있는 마을에 아침마다 파아란 우유차를 끌고 오던 늙은이는 지금은 없다 바알간 석양 비스듬히 십자가 교회당 하얀 꼬리를 흔들면서 지나가는 바람결에 항가리아 소녀 탱크에 깔려 간 소녀들의 프란네르 치맛자락이 명멸한다 소롯한 것이 있다 아쉬운 것이 있다 내 어두운 마음의 갤러리에 불을 밝히러 너는 온다 지도를 펴 놓고 이 논샤란스의 지구의 레이아웃(layout)를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일이면 늦으리 눈이 자꾸 쌓인다.
- [자유문학](1958. 12) -
조향 시인이 남긴 몇 안 되는 작품 중의 하나를 한번 더 소개할까 합니다. 조향 시인은 1950년대 기성의 문학적 질서와 권위를 철저히 부정하고 새로운 작품의 창작을 선언한 문인입니다. 그러나 전후세대 시인들의, 전세대의 암울하고 상투적인 문학에서 벗어나 1950년대 즉 20세기의 ‘후반기 문학’을 선도한다는 선언과 함께 시작된 그의 [후반기] 동인의 시에서도 역시 식민지 시대의 암울과 해방공간의 혼란, 전쟁의 참혹한 기억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검은 전설>이 대표적인 그러한 류의 대표적인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시는 일몰 시간에 일어나는 사물의 변화와 화자의 심경의 변화가 검은색을 주조로 하여 암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까아만 비로오드', `진흙빛 말갈', `검은 나비', `시커먼 종점', `검은 수선꽃', `까만 시곗줄', `어두운 마음' 등의 검은색이 전쟁 후 1950년대의 음울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답니다. `오전의 공백(空白)'이 `바알간 석양'으로 바뀌는 저녁나절에 깃든 것은 마치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과 같은 스산함이며 `마지막 피'가 연상시키는 절망과 희생뿐이군요. 멀리 `항가리아'에서 소녀들이 `탱크에 깔려간다‘는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지는 `지구'와 `내일'에 대한 불길한 상상과 묘사가 이 시의 주제입니다.
`내일이면 늦을 듯이‘ 눈이 자꾸 쌓이는 암담한 석양 풍경이 곧 화자의 내면풍경으로 생각됩니다. 시간의 흐름은 `레테의 강물'로 흐르면서 망각을 일으키고, 이러한 망각의 흐름 속에서 시간과 인생이란 `잠시 놀았다가’ `허겁지겁' 석양이 되는 해의 모습처럼 늘 조급하고 무의미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시간에 화자는 `지구의 레이아웃' 즉 `지도'를 펴놓고 우울한 미래와 같은 `검은 전설'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검은 색과 우울한 풍경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인간성과 일상의 평화가 존재 조건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폐허 의식으로 확대되는 도시 풍경일 겁니다. 전후의 세상이란 시민들의 합창이 가득한 새로운 도시를 꿈꾸었던 젊은 시인들도 벗어나기 힘든 마치 늪과 같은 침체이며 우울이었음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느껴볼 수 있습니다.
그의 시는 문명에 대한 절망과 현실생활의 암담함을 어둠, 부정, 황혼 등의 어두운 이미지로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외래어를 대담하게 도입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십 년 전에 본 스필버그의 영화 A.I가 생각났습니다. 전쟁 뒤에는 폐허만 남았지요. 유명한 역사가 마르크 블로흐는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이지요?’라는 어느 소년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역사를 위한 변명>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타르코프스키는 알렉산더의 어린 아들 고센이 던진 ‘아빠,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란 무슨 뜻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영화 <희생>을 통해 ‘인류문명을 위한 변명’을 시도했다고 말했습니다. 인류는 이제 희망을 잃어버린 채 구원만을 바라는 끝없는 기다림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물론이요 후손들의 세계에서를 위해서도 이런 류의 작품이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 평화를 기원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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