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

몽해 항로 - 당신의 그늘 / 장석주

by 언덕에서 2012. 11. 12.

 

 

 

 

<인공위성에서 찍은 흑해 사진>

 

 


몽해 항로

 

             ―당신의 그늘


                             장석주(1954 ~  )


구월 들어 흙비가 내리쳤다.

대가리와 깃털만 남은 멧비둘기는

포식자가 지나간 흔적이다.

공중에 뜬 새들을 세고

또 셌다. 자꾸 새들을 세는 동안 구월이 갔다.

식초에 절인 정어리가 먹고 싶었다.

며칠 입을 닫고 말을 삼간 것은

뇌수막염에 걸린 듯 말이 어눌해진 탓이다.

여뀌와 유순한 그늘과 나날이 어여뻐지는

노모와 함께 나는 만월의 슬하에 든다.

당신의 그늘을 알아,

당신에게 그늘이 없었다면

몇 그램의 키스를 탐하지 않았을 터다.

만월에는 오히려 성운(星雲)의 흐름이 흐릿하다.

금식 사흘째다. 오늘은 모자를 쓰고

안성 시내를 나갔다가 원산지 표시가 없는

쇠고기를 먹었다. 중국에서는 부화 직전의

병아리를 통째로 씹어 먹는다고 했다.

사람의 식욕은 그토록 처절하다.

초승달이 뜨고 모란꽃 지던 밤은

멀리 있었다. 밤엔 잠이 오지 않아

따뜻한 물에 꿀을 타서 마셨다.

흑해가 보고 싶었다.

물이 무겁고 차고 검다고 했다.

날이 차진 뒤 장롱에 넣었던 담요를 꺼냈다.

안성종고 이영신 선생이 올해 텃밭 수확물이라고

고구마 한 박스를 가져왔다.

모든 조개에 다 진주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삽살개의 눈에 자꾸

눈꼽이 낀다. 속병을 가진 모양이다.

집개는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못하는데,

나는 치통 때문에 신경 치료를 받으러

두 달간이나 치과병원을 드나든다.

작년보다 흰눈썹이 몇 올 더 늘고

바둑은 수읽기가 무뎌진 탓에 승률이 낮아졌다.

흑해에 갈 날이 더 가까워진 셈이다.


―《시인시각》 2009년 봄호








 

몽해항로는 죽음을 향해 가는 험난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줍니다. 시집 <몽해항로>는 삶의 바다를 건너가는 우리네 모습, 그대로이군요. 때론 흔들리기도 하고 때론 떠밀려가기도 하면서 우리는 한 시절을 항해 중인 것이지요. 먼 길을 나선 달팽이처럼 언젠가는 닿으리라는 꿈을 안고서 말입니다.

 흑해,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내륙해로 북부 해안에는 어업이 성하다고 하지요. 흑해 주변에는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가 있고, 포스포러스  해협, 마르모라 해, 다다넬즈 해협으로 지중해에 연결됩니다. 북부에 크림 반도, 아조프 해가 있고, 다뉴브, 드네프르, 드네스트르 등의 여러 하천이 흘러 들어가며, 강우량이 많은 편이어서 표층의 염분이 높다고 합니다. 표층수는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유출되며 저층수는 에게 해에서 유입된다는군요. 수온은 겨울철이 6℃이고 여름철이 23℃ 정도이니 따뜻한 바다네요. 시인은 그곳에 가고 싶어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 정신을 차리기 힘들만큼 빠르게 변하는 세상살이 속에서 시를 쓰는 또는 시를 읽는 일의 의미, 즉 느리게 사는 것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서울을 벗어난 10년 동안 고요의 삶 속에서 느림과 비움의 삶을 통해 얻은 마음의 기쁨과 평화, 인생의 참의미와 행복이 고스란히 녹아 있군요.

 몽해항로는 흑해, 그 죽음을 향해 가는 험난한 길을 뜻합니다. 꿈속 바닷길을 항해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비록 깨 버리면 그만인 덧없는 꿈이지만, 그 꿈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은 확대되고, 기존 현실과는 다른 현실을 탐색함으로써 삶의 지평은 확장됩니다. 그의 신선한 감각과 시어로 인해 새로운 세계와 삶의 영역을 경험하고 맙니다. 깊은 사유가 녹아있으면서도 감각적인 면을 생동감 있게 살려내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연사상을 통해 현대문명의 모순을 풀고자 애쓰는군요. 이런 시를 접한다는 건 영광이요, 행복입니다. 시인에게 감사를…….

 

 

 

 

354

 

'시(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빗소리 / 박형준  (0) 2012.11.26
야간열차 / 이수익  (0) 2012.11.19
이런 시(詩) / 이상(李箱)  (0) 2012.10.29
시월 / 이시영  (0) 2012.10.22
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  (0) 2012.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