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이시영 (1949 ~ )
심심했던지 재두루미가 후다닥 튀어 올라
푸른 하늘을 느릿느릿 헤엄쳐간다
그 옆의 콩꼬투리가 배시시 웃다가 그만
잘 여문 콩알을 우수수 쏟아놓는다
그 밑의 미꾸라지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봇도랑에 하얀 배를 마구 내놓고 통통거린다
먼 길을 가던 농부가 자기 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본다
(2005년 현대시학 11월호)
이 시에서는 아름다운 표현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가 엿보입니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을 가지고 맑은 서정이 넘치는 자연 서정시를 많이 썼지요. 시조의 수련에서 얻어진 언어적 절제력을 통해 전통적인 시적 감성을 새롭게 변용시켜 신선한 시각으로 절실한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에서는 시대와 사회 현실을 경직화된 도식으로 파악하지 않는 70년대 한국시의 감동적인 일면을 볼 수 있어 감동적이네요.
시인의 아버지라고 해도 그만인, 나의 아버지라도 해도 그만인 농부가 가을걷이를 시작하기 전 잠깐 일손이 빌 때, 그 가을에 대해 의젓해져서 어디 볼일을 보러 갑니다. 시 속의 재두루미와 콩꼬투리와 미꾸라지와 농부는 마치 읽는 이의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듯합니다. 위의 시는 시각적 평면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막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요.
이제 가을도 자작자작 뜸들어가고 있나요. 외로움과 그리움 가을 병도 이제 잦아지고 있나요. 밖에 나가보면 잘 찧은 햅쌀같이 포르스름한 기운 잘잘 흐르는 하늘 아래 밥 뜸들어가는 소리 냄새 나지는 않나요. 쓸쓸함이 아주 편안하게 익어가는 냄새, 마른 잎에 자작자작 바람 볼 부비는 소리. 아직 가을 한가운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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