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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안현미 - 와유(臥遊)

by 언덕에서 2012. 10. 8.

 

 

와유(臥遊)

 

                                         안현미 (1972 ~  )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 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 술에 취하리

 

'

- 『이별의 재구성』(창비 2009)

 

 

 


 

 

와유(臥遊)…….  사전을 찾아보니,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입니다.

 안현미의 와유(臥遊), 이 시를 읽으면서 황진이나 허난설헌이 이 시대에 살았다면 저런 시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만성풍우(滿城風雨)라는 고사성어도 생각납니다. <냉재야화(冷齋夜話)>와 <시화총귀(詩話總龜)> 나오는 이 말은 온 동네에 비바람이 가득 차 있다는 뜻으로, 여론이나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 사람들의 입에 계속 오르내리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만 가을 풍경을 떠올리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중국 송(宋)나라의 시인 사무일(謝無逸)이 글을 짓는 문인 친구인 반대림(潘大臨)에게 최근에 새로 지은 시가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반대림은,

 "가을의 풍경이 아름다워 한가로이 바람을 쐬면서 누워 있는데 숲속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빗소리에 일어나 시를 지어서 벽에다가 '성 안에 비바람 소리가 가득하니 중양절(重陽節)이 가까웠구나. (滿城風雨近重陽)'라는 시구(詩句)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세금을 독촉하러 온 사람 때문에 시흥(詩興)이 깨어져 이 한 구절밖에 지을 수 없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중양절이 가까워 오면 비바람이 크게 불었는데 가을의 정취를 나타내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나름대로 시를 많이 읽고 있고 또 써보려고도 노력합니다만 어떤 시는 해설이 되었든 감상이 되었든 단 한 마디도 덧붙일 수가 없습니다. 상상력의 빈곤함을 절감할 뿐이기도 하구요. 유년시절 장맛비가 내리는 날이면 마루에 비스듬히 누워 빗살무늬를 그리는 비와 먼 산의 흐려진 그림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와유(臥遊)이었지요. 청소년 시절, 어느 비 오는 날, 다락방에서 성당의 주일학교 여선생님에게 편지를 썼던 기억도 있습니다. 별들이 쏟아지던 북아현동 꼭대기 자취방에서 후배에게 긴 연서를 부치던 기억도 남아있구요. 그렇게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릴 수는 있어도 도저히 말을 덧붙일 수 없는 시가 있습니다. 혼자서 느끼고 취할 뿐이지요. 이 계절에 어울리는 명시, 안현미 시인의 와유(臥遊)라는 시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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