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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101

딱지꽃 - 나를 다스리는 꽃 / 황대권 딱지꽃 - 나를 다스리는 꽃 황대권 (1955 ~ ) 만(慢),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뜻하는 남태평양 연안 원주민의 언어 mana의 한역(漢譯). 아만(我慢), 자신이 남보다 훌륭하다고 망상하여 남에게 뽐내려 드는 방자한 마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학식이나 용모, 혈통 등 자신이 갖고 있는 조건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는 마음은 교(驕)인데 반해, 만은 무조건 자기 자신이 낫다고 느끼는 본능적 심성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교는 오히려 다스리기 쉽다고 하겠으나, 만은 그 뿌리가 깊고 미묘하므로, 인간의 해탈을 막는 열 가지 족쇄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마지막 족쇄에 속하여 아라한과를 성취해야 비로소 완전히 소멸된다. 범어의 원래 뜻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긴 자의식(自意識)을 가리킴. 만(慢.. 2010. 12. 28.
잃어버린 동화 / 박문하 잃어버린 동화 박문하(朴文夏, 1917 ~ 1975) 가을비가 스산히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이미 밤도 깊었는데 나는 비 속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어느 골목길 한 모퉁이 조그마한 빈 집터 앞에서 화석처럼 혼자 서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는 오막살이 초가 한 채가 서 있었던 곳이다. 와보지 못한 그 새, 초가는 헐리어져 없어지고, 그 빈 집터 위에는 이제 새로 집을 세우려고 콘크리트의 기초 공사가 되어져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 앞에 묵연히 선 듯, 내 마음과 발걸음은 차마 이 빈 집터 앞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웅장미를 자랑하는 로마 시대의 고적도 아니요, 겨레의 피가 통하는 백제, 고구려나 서라벌의 유적도 아닌, 보잘것없는 한 칸 초옥이 헐리운 빈 터전이 이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 2010. 12. 23.
주도유단(酒道有段) / 조지훈 酒道有段 조지훈(1920 ~ 1968)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기고만장하여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偉人) 현사(賢士)도 안중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주정만 하면 다 주정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酒格)은 높아지지 않는다. 주도(酒道)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넷째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 술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段)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음주에는 무릇 열여덟.. 2010. 12. 21.
짜장면 / 정진권 짜장면 정진권(1935 ~ ) 짜장면은 좀 침침한 작은 중국집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그 방은 퍽 좁아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깨끗지 못해야 하고, 칸막이에는 콩알만 한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어야 어울린다. 식탁은 널판으로 아무렇게나 만든 앉은뱅이가 좋고, 그 위엔 담뱃불에 탄 자국들이 검게 또렷하게 무수히 산재해 있어야 정이 간다. 방석도 때에 절어 윤이 날 듯하고 손으로 잡으면 단번에 쩍 하고 달라붙는 것이어야 앉기에 마음이 편하다. 고춧가루 그릇은 약간의 먼지가 끼여 있는 게 좋고 금이 갔거나 다소 깨어져 있으면 더욱 운치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고춧가루는 누렇고 굵고 억센 것이어야 한다. 식초병이나 간장병도 다소 때가 끼여 있어야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댈 수 있다. 짜장면 그릇으로 가장.. 2010. 12. 16.
12월의 편지 / 이해인 12월의 편지 이해인(1945 ~ ) 12월이 되니 벌써 크리스마스카드들이 날아옵니다. 해마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 늘 초조했는데 올해는 오히려 느긋하게 웃을 수 있는 나를 봅니다. 이별의 슬픔과 몸의 아픔을 견디어 내며 "아직"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동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님의 병실에서 그분과 함께 깨죽을 먹은 후 내가 기도를 부탁했을 때, 하도 말을 길게 하시어 "힘드신데 좀 짧게 하시죠" 하니 "상대가 문인이라 나름대로 신경 좀 써서 하느라 그랬지!" 웃으며 대답하셨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우린 꼭 한 반 해야 한다고 말했던 화가 김점선, 고운 카드와 스티커를 즐겨 선물했던 장영희 교수, 문병 와서 덕담을 해주던 옛 친구 윤영순…. 모두 다 저.. 2010. 12. 9.
저구마을 아침편지 / 이진우 저구마을 아침편지 이진우(1965 ~ ) 행복한 풍경 창 밖에 달린 풍경(風磬) 얘기로 저의 첫 글을 열겠습니다. 풍경은 바람과 어울려 수다를 잘 떱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찾아오는 바람이 늘 같은 바람은 아닌가 봅니다. 소곤소곤, 두런두런, 시끌벅적, 투덜투덜…별 모양이 다 있나 봅니다. 아이는 학교 가고 아내마저 어디 가고 없는 날, 목을 빼고 창 밖을 내다보노라면 풍경은 신이 나서 더 큰 소리를 내지요. 바람이 많은 바닷가 마을이기는 해도 풍경이 입을 다물 때도 있습니다. 저녁 9시, 막차가 끊어지면 아직 잠들지 않은 불빛도 꾸벅꾸벅 좁니다. 나지막하게 울리며 빈 마을을 지키던 풍경이 기척조차 없을 때면 창문을 열고 바람의 행방을 수소문합니다. 풍경이 한숨을 쉬듯 한 마디를 내뱉고 고개를 돌리.. 2010. 12. 7.
우체부 / 최명희 우체부 최명희(1947 ~ 1998) 그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낯설지 않다. 플라타너스가 한들거리는 신작로, 산모퉁이를 도는 오솔길, 고층 건물이 어지럽고 자동차 소음이 날카로운 대도시 도로, 내게 편지라고는 올 리 없는 이역 먼 거리에서도 그는 반갑다. 우체부를 만나면 그가 특이한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내줄 것만 같은 기대로 마음이 차오르곤 한다. 그의 음성은 항상 즐거운 긴장을 준다. 내게는 편지 보낼 곳도, 편지 올 곳도 별로 없으면서, 그의 음성이 먼 곳에서부터 들리면 공연히 가슴을 조인다. 더욱이 볕발이 투명한 가을 오후에 울타리를 넘어오는 그의 소리는 유난히 귀를 기울이게 해준다. 가까워지던 목소리가 나를 부르지 않고 그냥 지나칠 때는 그만 가슴이 텅 비어 버리고, 뛰쳐나가 그의 .. 2010. 12. 2.
그믐달 / 나도향 그믐달 나도향(1902 ~ 1926) 나는 그믐날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날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女王)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 2010. 11. 30.
산정무한(山情無限) / 정비석 산정무한(山情無限) 정비석(1911 ~ 1991)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감치 눈이 떠진 것은 몸이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던 영봉(靈峯)들을 대면(對面)하려고 새댁 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峻峯)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容易)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 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밋밋하게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野山)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기품(氣稟)이 있어.. 2010. 11. 25.
청춘예찬 / 민태원 청춘예찬 민태원(1894 ~ 1935)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과 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얼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 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따뜻한 봄바람이다.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2010. 11. 23.
먼 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 먼 곳에의 그리움 전혜린(田惠麟, 1934 ~ 1965)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 드린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시키는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잘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비하만의 시구(詩句)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 2010. 11. 18.
병석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 / 김유정 병석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 김유정(1908 ~ 1937) 형아! 나는 날로 몸이 꺼져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猛熱)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찾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 일으키기 어렵겠다. 형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형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 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대중화되고 .. 2010.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