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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101

구두 / 계용묵 구두 계용묵(1904 ~ 1961) 구두 수선(修繕)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는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구,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귀맛에 역(逆)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鋪道)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音響)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은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으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昌慶苑)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 2011. 2. 10.
슬픔에 관하여 / 류달영 슬픔에 관하여 류달영 (1911 ~ 2004) 사람의 일생은 기쁨과 슬픔을 경위(經緯)로 하여 짜가는 한 조각의 비단일 것 같다. 기쁨만으로 일생을 보내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으로 평생을 지내는 사람도 없다. 기쁘기만 한 듯이 보이는 사람의 흉중(胸中)에도 슬픔이 깃들이며, 슬프게만 보이는 사람의 눈에도 기쁜 웃음이 빛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쁘다 해서 그것에만 도취(陶醉)될 것도 아니며, 슬프다 해서 절망만 일삼을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책상 앞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고호가 그린 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구름이 얇게 무늬지고, 넓은 들에는 추수(秋收)할 곡식이 그득한데, 젊은 아내는 바구니를 든 채 나귀를 타고, 남편인 농부는 포크를 메고 그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2011. 2. 8.
봉숭아 꽃 / 김지하 봉숭아꽃 김지하(1941 ~ ) 내 방 문 앞 화단에 봉숭아꽃이 활짝 폈다. 우리네 살림살이에서 봉숭아꽃이 자취를 감춘 게 그 언제던가? 그 언젠지도 모르게 봉숭아꽃, 채송화, 분꽃, 맨드라미 등이 우리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검은 살결에 흰 무명옷, 검은 머리채에 흰 이를 드러내고 웃던 누님의 모습처럼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없다. 봉숭아꽃으로 물들인 누님의 그 분홍빛 손톱에서 떠오르던 그 소담한 아름다움도 자취 없다. 지금 와 생각해본다. 그 누님은 오직 제 몸에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 봉숭아꽃을 손톱에 물들였을까? 옛 어른들은 말하길 봉숭아꽃을 손톱에 물들이면 신경통이 가라앉고 저승길이 밝아진다고 했다. 그것은 또 무슨 뜻이었을까? 봉숭아 꽃잎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신경통에 효험이 .. 2011. 2. 1.
미운 간호부 / 주요섭 미운 간호부 주요섭(1902 ~ 1972) 어제 S병원 전염병실에서 본 일이다. A라는 소녀, 7, 8세밖에 안 된 귀여운 소녀가 죽어 나갔다. 적리(赤痢)로 하루는 집에서 앓고, 그 다음 날 하루는 병원에서 앓고, 그리고 그 다음 날 오후에는 시체실로 떠메어 나갔다. 사흘 밤낮을 지키고 앉아 있었던 어머니는 아이가 운명하는 것을 보고, 죽은 애 아버지를 부르러 집에 다녀왔다. 그 동안 죽은 애는 이미 시체실로 옮겨가 있었다. 부모는 간호부더러 시체실을 가리켜 달라고 청하였다. "시체실은 쇠 다 채우고 아무도 없으니까, 가 보실 필요가 없어요." 하고 간호부는 톡 쏘아 말하였다. 퍽 싫증난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 그 애를 혼자 두고 방에 쇠를 채워요?" 하고 묻는 아이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었다. ".. 2011. 1. 27.
약속 / 장영희 약속 장영희 (1952 ~ 2009) 아침에 눈을 뜨면 문득 이유 모를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마치 심장이 천천히 오그라드는 듯, 뻐근하게 가슴이 옥죄어 오다가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두려움과 공허감 말이다. 이 주변머리 없는 성격으로 또다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일이, 아니 앞으로 지상에서의 남은 나의 삶을 하루하루 헤쳐 나가야 할 일이 아득하다. 미운 사람 보고도 반가운 척 웃고, 하고 싶지 않은 말도 꼭 해야 할 때가 있고, 지키지 못할 약속인 줄 알면서도 무조건 남발하고,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이 '살아감의 절차'를 다시 되풀이해야 할 일이 한심하다. 시지푸스의 비극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돌을 또다시 혼신의 힘을 다해 올려 놓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그의 비극.. 2011. 1. 25.
잊지 못할 윤동주 /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정병욱(1922~1982)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즐겨 거닐던 서강 일대에는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창냇벌을 꿰뚫고 흐르던 창내가 자취를 감추어 버릴 만큼, 오늘날 신촌은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달 밝은 밤이면 으레 나섰던 그의 산책길에 풀벌레 소리가 멈춘 지 오래고, 그가 사색의 보금자리로 삼았던 외인 묘지는 계절 감각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가 묵고 있던 하숙집 아주머니는 어쩌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마는 것이지만, 동주에 대한 나의 추억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내가 동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오똑하게 솟은 콧날.. 2011. 1. 20.
밥하시는 모습이 그땐 창피했지만 / 서영은 밥하시는 모습이 그땐 창피했지만… 서영은(1943 ~ ) 아버지는 내가 열아홉 살 나던 해 여름, 62세로 돌아가셨다.아버지 인생의 3분의 2 이상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지나간 까닭에,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분’이라는 사람들의 평판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를 내 생각만큼씩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일곱 살 무렵의 아버지는 나에게 올라타는 말이었다. “이랴 낄낄”하고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등판을 두드리면, 말이 된 아버지는 방 안을 엉금엉금 기어다녔다. 어머니는 삼대 독자인 외아들보다 딸을 더 귀여워하는 아버지를 못마땅히 여겼다. 불만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휴일만 되면 낫을 보자기에 싸들고 ‘밥이 나오는 것도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닌’ 산소에 가자고 채근하는 것은 ‘벽창호.. 2011. 1. 18.
버릴 것 없는 어머니의 물건 / 조경란 버릴 것 없는 어머니의 물건 조경란(1969~ ) 사진작가 박기호 씨의 전시를 보러 갔다가 함께 간 Y 선생을 통해 중국 작가 쑹둥(宋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사라지는 것을 찾는 일,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바로 두 예술가의 공통점이었거든요. 쑹둥은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에서 ‘버릴 것 없는’이라는 설치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한 적이 있어요. 이 작품은 작가의 어머니가 30년 동안 모아 온 물건, 이를테면 신발이라든가 이불 옷 혹은 냄비 같은 그릇이며 심지어는 비닐봉지 같은 것을 전시한 방대한 작품이에요. 어려웠던 시절을 겪은 세대가 갖고 있는 절약과 보관의 일상적인 생활습관을 작품의 소재로 활용했지만 무엇보다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건 작품이 모두 ‘어머니’가 쓰던 물건이라는 점이었지요(전시.. 2011. 1. 13.
바보네 가게 / 박연구 바보네 가게 박연구(1934 ~ 2003) 우리 집 근처에는 식료품 가게가 세 군데 있다. 그런데 유독 '바보네 가게'로만 손님이 몰렸다. '바보네 가게' - 어쩐지 이름이 좋았다.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쌀 것 같이만 생각되었다. 말하자면 깍쟁이 같은 인상이 없기 때문에, 똑 같은 물건을 같은 값을 주고 샀을지라도 싸게 산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어째서 '바보네 가게'라고 부르는가고 물어 보았다. 지금 가게 주인보다 먼저 있었던 주인의 집에 바보가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불러 오고 있는데, 지금 주인 역시 그 이름을 싫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집에서는 콩나물 같은 건 하나도 이를 보지 않고 딴 가게보다 훨씬 싸게 주어 버려 다른 물건도 으레 싸게 팔겠거니 싶은 인상.. 2011. 1. 11.
헐려 짓는 광화문 / 설의식 헐려 짓는 광화문 설의식(1900 ~ 1954)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은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廳舍)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정책 덕택으로 다시 지어지리라 한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면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의식 없는 물건이요, 말 못하는 물건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되, 반항도 회피도 기뻐도 설워도 아니한다. 다만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땅을 같이한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하고 못 잊어할 뿐이다. 오백 년 동안 풍우(風雨)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여 울어도 보고 설워도 할 뿐이다. 석공의 망치가 네 가슴.. 2011. 1. 6.
동해 / 백석 동해 백석(1912 ~ 1995) 동해여, 오늘밤은 이렇게 무더워 나는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닙네. 맥고 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닐면 어데서 닉닉한 비릿한 짠물 내음새 풍겨 오는데, 동해여 아마 이것은 그대의 바윗등에 모래장변에 날미역이 한불 널린 탓인가 본데 미역 널린 곳엔 방게가 어성기는가, 도요가 씨양씨양 우는가, 안마을 처녀가 누구를 기다리고 섰는가, 또 나와 같이 이 밤이 무더워서 소주에 취한 사람이 기웃들이 누웠는가. 분명히 이것은 날미역의 내음새인데 오늘 낮 물기가 쳐서 물가에 미역이 많이 떠들어 온 것이겠지.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날미역 내음새 맡으면 동해여, 나는 그대의 조개가 되고 싶읍네. 어려서는 꽃조개가, 자라서는 명주조개가, 늙어서는 .. 2011. 1. 4.
지란지교를 꿈꾸며 / 유안진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유안진(1941 ~ )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히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라도 좋고 남성이라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2010.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