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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101

거룩한 본능 / 김규련 거룩한 본능 김규련 (1929 ~ ) 동해안 백암(白巖) 온천에서 눈이 쌓인 주령(珠嶺)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首比面)으로, 대구(大邱)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마을이라고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天惠)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菜蔬)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따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 들이.. 2011. 5. 17.
두부장수 / 최현배 두부장수 최현배(1894~ 1970) 울산. 최현배 생가 서울의 명물―아니 진경의 하나는 확실히 행상들의 외치는 소리이다. 조석으로, 이 골목 저 골목에는 혹은 곧은 목소리로, 혹은 타목으로, 또 남성으로, 혹은 여성으로 제가끔 제 가진 물건들을 사 달라고 외친다. 이 소리에 귀가 닳은 서울 사람에게는 아무 신기할 것 없겠지만, 처음으로 서울로 올라온 시골 사람의 귀에는 이 행상들의 외는 소리처럼 이상야릇한 서울의 진풍경은 없을 것이다. 오늘에서 돌이켜 생각하면 꼭 13년 전의 일이다. 내가 시골서 백여 리를 걸어 겨우 경부선 물금역에 가서 생전 처음 보는 기차를 타고 공부차로 서울에 와 잡은 주인집은 관훈방 청석골 정 소사의 집이었다. 같이 온 동무도 있거니와 이 주인집에 묵는 학생들은 고향 친척도 있.. 2011. 5. 12.
나의 단장(短杖) 나의 단장(短杖) 김동석(金東錫, 1913~?) 나서 고생하다가 죽는 것이 누구나 피치 못할 운명일지라도 언제나 젊고 싶고 늙고 싶지 않은 것이 인정이요, 만인의 공통된 염원일 것이다. 여북해야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라는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그러나 노인 앞에선 안경도 못 쓰고, 담배도 못 피우고 술도 못 마시고, 편히 앉지도 못하는 것이 청춘이라면 청춘의 보람이 무엇이며, 마음껏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이 무슨 청춘일까.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얼른 어른이 되고 일찌감치 늙으려고 의식적으로 꾀하였던 것이다. 다리를 쭉 뻗고 기를 펴고 지내보려면 모름지기 존장(尊長)이 돼야 할지니 젊은이들은 웅크리고 숨죽이고 눌려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뻗고 펴고 자라는 생명이 점점 구부러지고 움츠려지고 시들어졌다. 그래서 .. 2011. 5. 10.
무서운 년 / 김점선 무서운 년 김점선 (1946 ~ 2009) 마흔을 훌쩍 넘겼던 해의 어느 날, 부모님이 우리집에 왔다. 구석방에서 남편을 앉혀놓고 내 이야기를 했다. 나는 관심도 없었다. 부모님이 가고 난 후 남편이 내게 말했다. "자기는 무서운 년이래"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내게 한 푼의 돈도 더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더없이 완강했다. 아무리 그런다고 내가 포기하겠나. 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동생들을 다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다 학교에서 자퇴해라. 너희들의 월사금은 다 내가 쓰겠다. 너희들 중 한 놈도 밤새워 공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수한 놈도 없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놈도 없다. 미래에 대한 야망도 없는 너희들은 어정쩡한 .. 2011. 5. 5.
매화 / 김용준 매화 김용준 (1904 ~ 1967)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수묵(水墨) 빛깔로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墨痕)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아 나타나는 완자창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실례의 말씀이오나 “오래간만에 우리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청하신 선생의 말씀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도 실은 선생을 대한다는 기쁨보다는 댁에 매화가 성개(盛開)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때문이요, 십 리나 되는 비탈길을 얼음 빙판에 콧방아를 찧어 가면서 그 초라한 선생의 서재(書齋)를 황혼 가까이 찾아갔다는 이유도 댁의 매화를 달과 함께 보려 함이었습니다. 매화에 달 이야기가 났으.. 2011. 5. 3.
해학송(諧謔頌) / 최태호 해학송(諧謔頌) 최태호 (1915 ~ 1987) 우스갯소리를 잘 하는 사람이 친구 집에 찾아가니, 주인이 차려온 술상에 안주라고는 채소뿐이었다. 주인이 미리 말막음으로, "집안이 구차해서 고기 한 점 안 놓여 미안하네." 하였다. 시쳇말로 green field였던 모양이다. 그 때 마침 마당에 닭 여러 마리가 나와서 모이를 쪼고 있었다. 우스개 잘 하는 친구 말하기를, "대장부가 친구를 만나 어찌 천금을 아끼겠나? 내 당나귀 잡아 안주를 장만하게나." 하였다. 주인이 깜짝 놀라, "나귀를 잡아먹으면 자넨 무엇을 타고 돌아가겠나?" 그 친구 대답이 태연하였다. "닭을 타고 가지." 주인은 크게 웃고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속의 한 토막이다. 대문장가로서 , , 등을 남긴 분의 글 속에서 .. 2011. 4. 28.
빙수 / 방정환 빙수1 방정환 (1899 ~ 1931) “조선의 여름이란 낮에는 몹시 따가워도 저녁때의 서늘한 맛이 정말 좋아요.” 밤중까지 푹푹 삶아내는 나라에서 살다가 온 일본 사람들이 저녁마다 이 말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만 살아서 이 특별한 맛을 모르고 지내지만 조선의 달빛(月色)이 특별히 밝은 것처럼 여름날의 저녁은 특별히 맑고 서늘하다. 여름날 저녁에 얼음집에 수그리고 기어 들어가는 사람은 이 맛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고마운 저녁이 오기까지, 높다란 하늘에 아득히 떠서 서늘한 기운을 솔솔 내리는 별들이 나타나기까지 그때까지 얼마나 기다란 낮이냐. 널따란 길바닥과 지붕의 기왓장까지 불볕에 타고 있고 소도 말도 걸음을 걷지 못하고 더위에 늘어지는 뙤약볕에 오직 한 가지 바닷물보다 더 푸른색으로 쓰인.. 2011. 4. 26.
얼굴 / 안병욱 얼굴 안병욱 (1920 ~ ) 사람은 저마다 정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착하고 품위 있는 얼굴의 소유자도 있고, 흉하고 험상궂은 얼굴을 가진 이도 있다. 우리는 자기의 얼굴을 선택하는 자유는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님한테서 선물로 받은 얼굴이다. 재주나 체질과 마찬가지로 운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누구나 맑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기를 원한다. 추하고 못생긴 얼굴을 바라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톨스토이의 자서전적 작품을 읽어보면, 젊었을 때 자기의 코가 넓적하고 보기 흉한 것을 무척 비관하고 염세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젊었을 때에는 특히 자기 얼굴의 미추에 대해서 유별한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젊은 여자일수록 더하다. 얼굴의 근본 바탕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 2011. 4. 21.
냉면 / 김남천 냉면 김남천(1911 ~ 1953) '냉면'이라는 말에 '평양'이 붙어서 '평양냉면' 이라야 비로소 어울리는 격에 맞는 말이 되듯이 냉면은 평양에 있어 대표적인 음식이다. 언제부터 이 냉면이 평양에 들어왔으며 언제부터 냉면이 평안도 사람의 입가에 가장 많이 기호에 맞는 음식물이 되었는지는 나 같은 무식쟁이에게는 알 수도 없고 또 알려고도 아니한다. 어렸을 때 우리가 냉면을 국수라 하여 비로소 입게 대게 된 시일을 기억하는 평안도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밥보다도 아니 쌀로 만든 음식물보다도 이르게 나는 이 국수 맛을 알았을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어른들의 냉면 그릇에서 여남은 오리를 끓어서 이가 서너 개 나나마나 한 입으로 메밀로 만든 이 음식물을 받아 삼킨 것.. 2011. 4. 19.
아버지의 추억 / 은희경 아버지의 추억 은희경(1959 ~ ) 나의 아버지는 한시라도 재미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분이다. 피란지에서 보낸 대학시절에는 늦둥이 막내아들답게 부모를 속여 타낸 돈으로 친구들과 바닷가를 쏘다녔고, ‘증산 수출 건설’의 시대에는 뇌물과 접대로 굴러가는 노가다 판의 젊은 건설업자로서 재미있을 만한 일은 모두 다 해봤다. 심지어는 일흔 되던 해 암이 재발해서 의사들이 손도 못 대보고 환부를 덮어버린 지 한 달 만에 골프장에 나갔던 분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배짱과 낙천성뿐이었던 아버지는 그리 행운이 따르지 않는 자신의 인생을 지략과 언변으로 돌파해 나가려고 했다. 거기에 또 한 가지 아버지의 밑천이 있다면 그것은 농담이다. 아버지는 늘 농담을 해서 주변 사람을 웃게도, 또 기가 차게도 만들었다. 부도가 나.. 2011. 4. 14.
백주(白晝)에 소를 타고 / 변영로 백주(白晝)에 소를 타고 변영로 (1897 ~ 1961) 역시 혜화동 우거에서 지낼 때였다. 어느 날 바카스의 후예들인지 유영(劉怜)의 직손들인지는 몰라도 주도의 명인들인 *공초, 성재, 횡보 3주선(酒仙)이 내방하였다. 설사 주인이 불주객(不酒客)이라 하더라도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별 도리가 없었을 것은 거의 상식문제인데, 주인이랍시는 나 역시 술 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후되지 않는 처지로 그야말로 불가무일배주(不可無一杯酒)였다. 허나 딱한 노릇은 네 사람의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삼 원, 그때 수삼 원이면 보통 주객인 경우에는 3,4인이 해갈은 함 즉하였으나 우리들 무리 4인에 한하여서는 그런 금액쯤은 유불여무(有不如無)였다. 나는 아무리 하여도 별로 시원한 책략이 없어 궁하면 통한다는 원리.. 2011. 4. 7.
정미소 풍경 / 구활 정미소 풍경 구활 (1942 ~ ) 폐허의 성처럼 버티고 서 있는 낡은 정미소. 유령이 나올 것만 같은 정미소 앞을 지나칠 때면 마음 한구석이 찡해 온다. 헛간을 덮고 있던 지붕 한쪽은 날아가 비바람이 그냥 들어오고, 다른 한쪽 지붕은 임시방편으로 색깔 다른 함석으로 덧땜질해 두었지만 미풍에도 소리를 내는 박자가 제멋대로인 타악기로 변한지 오래다. 두고 떠나온 고향이 못내 그리워 시골 여행을 할 때마다 정미소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차를 세워 이곳저곳을 살펴보지만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생동감 있는 기계음은 들리지 않는다. 낱알을 주워 먹던 참새 떼도, 나락 가마니 속을 들락거리던 쥐들도 더 이상 먹을 게 없어 이사를 갔는지 사위(四圍)는 적요롭기 그지없다. 그래도 햇볕만은 떨어져 나간 천장의 빈 공간을 타고.. 2011.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