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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주도유단(酒道有段) / 조지훈

by 언덕에서 2010. 12. 21.

 

 

 

酒道有段

 

 

                                                                     조지훈(1920 ~ 1968)

 

 

 

 <술주정뱅이 : 출처 daum '유머' 카페>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기고만장하여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偉人) 현사(賢士)도 안중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주정만 하면 다 주정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酒格)은 높아지지 않는다. 주도(酒道)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넷째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 술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段)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음주에는 무릇 열여덟의 계단이 있다.

(1)불주(不酒) :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

(2)외주(畏酒) :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3)민주(憫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4)은주(隱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5)상주(商酒) : 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술을 내는 사람.

(6)색주(色酒) : 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7)수주(睡酒) :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8)반주(飯酒) : 밥맛을 돕기 위해서 마시는 사람.

(9)학주(學酒) :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酒卒).

(10)애주(愛酒) :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酒徒).

(11)기주(嗜酒) :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酒客).

(12)탐주(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酒豪).

(13)폭주(暴酒) : 주도(酒道)를 수련하는 사람(酒狂).

(14)장주(長酒) : 주도 삼매에 든 사람(酒仙).

(15)석주(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酒賢).

(16)낙주(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酒聖).

(17)관주(觀酒) :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酒宗).

(18)폐주(廢酒)·열반주(涅磐酒) :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불주·외주·민주·은주는 술의 진경(眞境)·진미를 모르는 사람들이요, 상주·색주·수주·반주는 목적을 위하여 마시는 술이니 술의 진체(眞諦)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학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酒道) 초급(初級)을 주고 주졸(酒卒)이란 칭호를 줄 수 있다. 반주는 2급이요, 차례로 내려가서 불주가 9급이니 그 이하는 척주(斥酒) 반주당(反酒黨)들이다.

 애주·기주·탐주·폭주는 술의 진미·진경을 오달(悟達)한 사람이요, 장주·석주·낙주·관주는 술의 진미를 체득하고 다시 한 번 넘어서 임운자적(任運自適)하는 사람들이다. 애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酒道)의 초단을 주고 주도(酒徒)란 칭호를 줄 수 있다. 기주가 2단이요, 차례로 올라가서 열반주(涅磐酒)가 9단으로 명인급(名人級)이다. 그 이상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니 단(段)을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주도(酒道)의 단은 때와 곳을 따라, 그 질량의 조건에 따라 비약이 심하고 강등이 심하다. 다만 이 대강령만은 확호(確乎)한 것이니 유단(有段)의 실력을 얻자면 수업료가 기백만금이 들 것이요, 수행(修行) 연한이 또한 기십 년이 필요할 것이다(단, 천재는 비한(比限)에 부재(不在)이다).

 요즘 바둑열이 왕성하여 도처에 기원이다. 주도열(酒道熱)은 그보다 훨씬 먼저인 태초 이래로 지금까지 쇠미한 적이 없지만 난세는 사도(斯道)마저 추락케 하여 질적 저하가 심하다.

 내 비록 학주의 소졸(小卒)이지만 아마추어 주원(酒院)의 사범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건만 20년 정진에 겨우 초급으로 이미 몸은 관주(觀酒)의 경(境)에 있으니 돌돌(口出口出), 인생사 한도 많음이어!

 술 이야기를 써서 생기는 고료는 술 마시기 위한 주전(酒錢)을 삼는 것이 제격이다. 글쓰기보다는 술 마시는 것이 훨씬 쉽고 글 쓰는 재미보다도 술 마시는 재미가 더 깊은 것을 깨달은 사람은 글이고 무엇이고 만사휴의다.

 술 좋아하는 사람 쳐놓고 악인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술꾼이란 만사에 악착같이 달라붙지 않고 흔들거리기 때문이요, 그 때문에 모든 일에 야무지지 못하다. 음주 유단(有段)! 고단(高段)도 많지만 학주의 경(境)이 최고 경지라고 보는 나의 졸견은 내가 아직 세속의 망념을 다 씻어 버리지 못한 탓이다. 주도의 정견(正見)에서 보면 공리론적(功利論的) 경향이라 하리라. 천하의 호주(好酒) 동호자 제씨의 의견은 약하(若何)오.

 

 


 

 

조지훈. 시인. 대학교수 경북 영양 출생. 1939년 《문장》지로 등단. 자유문학상 등 수상. 고려대 교수 역임. 1968년 작고. 시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 앞에서』 등과 수필집 『돌의 미학』, 그외 『조지훈전집』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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