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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짜장면 / 정진권

by 언덕에서 2010. 12. 16.

 

 

 

짜장면

 

                                                                                  정진권(1935 ~ )

 

 

 

 

짜장면은 좀 침침한 작은 중국집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그 방은 퍽 좁아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깨끗지 못해야 하고, 칸막이에는 콩알만 한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어야 어울린다. 식탁은 널판으로 아무렇게나 만든 앉은뱅이가 좋고, 그 위엔 담뱃불에 탄 자국들이 검게 또렷하게 무수히 산재해 있어야 정이 간다. 방석도 때에 절어 윤이 날 듯하고 손으로 잡으면 단번에 쩍 하고 달라붙는 것이어야 앉기에 마음이 편하다.

 고춧가루 그릇은 약간의 먼지가 끼여 있는 게 좋고 금이 갔거나 다소 깨어져 있으면 더욱 운치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고춧가루는 누렇고 굵고 억센 것이어야 한다. 식초병이나 간장병도 다소 때가 끼여 있어야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댈 수 있다. 짜장면 그릇으로 가장 흔한 것은 희고 납작하게 생긴 것인데, 할 수 있으면 거무스레하고 이가 한 군데쯤 빠진 게 좋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은 뚱뚱해야 한다. 머리엔 한번도 기름을 바른 일이 없고, 인심 좋은 얼굴엔 개기름이 번들거리며, 깨끗지 못한 손은 소두방만하고 신발은 여름이어도 털신이어야 좋다. 나는 그가 때에 전 검은색의 중국옷을 입고 있길 바라지만 지금은 그런 옷을 보기 어려우니 낡은 스웨터로 참아두자. 어떻든 이런 주인에게 돈을 치르고 나오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하다.

 내가 어려서 최초로 대면한 중국 음식이 짜장면이고(짜장면이 정말 중국의 전통적인 음식인지 어떤지는 따지지 말자), 내가 맨 처음 가본 내 고향의 중국집이 그런 집이고, 이따금 흑설탕을 한 봉지씩 싸주며 “이거 먹어해, 헤헤헤.” 하던 그 집 주인이 그런 사람이어서, 나는 중국 음식이라면 우선 짜장면을 생각했고 중국집이나 중국 사람은 다 그런 줄로만 알고 컸다.

 스무 살 적 서울에 처음 왔을 때도 나는 짜장면을 잘 사 먹었는데, 그 그릇이나 맛, 그 방안의 풍경, 비록 흑설탕은 싸 주지 않았으나 그 주인의 모습까지도 내 고향의 그 짜장면, 그 중국집 그 짱궤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변두리만 다녀서였을까? 해서 내가 처음으로 으리으리한 중국집 그 엄청난 중국 요리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것들이 온통 가짜 같았고 불안했다.

 그 동안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음식점이 많이도 불어났다. 한식, 중국식, 일본식, 서양식, 또 무슨 식이 더 있는지 모른다. 값이 비싸다는 데도 있고 보통이라는 데도 있고 싼 듯한 곳도 있다. 비싸다는 곳은 잘 모르지만 보통이라는 데는 더러 가 보았다. 그러나 얻어먹을 때는 불안하고 내가 낼 때는 갈빗대가 휘어서 그곳의 분위기와 음식 맛을 한번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래도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곳은 그 싼 듯한 곳일 수밖에 없고, 그 싼 듯한 곳 중에선 위에 말한 그런 주인의 그런 중국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싸구려 한식은 집에서 늘 먹으니 갈 필요가 없고, 싸구려 왜식이나 양식은 먹어 봤자 국적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국적 있는 왜·양식을 먹으려면 비싸다는 데 내지 최소한 보통이라는 데는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친애하는 짜장면 장수 여러분도 자꾸만 집을 수리하고 늘리고 새 시설을 갖추는 모양이다. 돈을 벌고 나보다 훌륭한 고객을 맞고, 그리하여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것이야 물론 그분들의 정당한 소원이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우리 동네와 내 직장 근처에만은 좁고 깨끗지 못한 중국집과 내 어리던 날의 그 짱궤 같은 뚱뚱한 주인이 오래오래 몇 만 남아 있었으면 한다.

 그러면 나는 어느 토요일 저녁때 혹은 일요일 점심때 호기 있게 내 아이들을 인솔하고 우리 동네 그 중국집으로 갈 것이다. 아내도 그때만은 잠시 가계부를 잊고 흔쾌히 따라나설 것이다. 아이들은 입술에다 볼에다 짜장을 바르고 깔깔대며 맛있게 먹을 것이고, 아내는 아이들을 닦아 주면서 역시 맛있게 먹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모처럼 유능한 가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퇴근길에 친구를 만나면 나는 그의 손을 이끌고 내 직장 근처의 그 중국집으로 선뜻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는 양파 조각에 짜장을 묻혀 들고, 또는 따끈한 군만두 하나를 집어 들고 “이 사람 어서 들어” 하며 고량주 한 병을 맛있게 비운 다음 함께 짜장면을 나눌 것이다. 내 친구도 세상을 좁게 겁 많게 사는 사람이니 나를 보고 그래도 인정 있는 친구라고 할 것 아닌가.

 짜장면은 좀 침침한 작은 중국집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정진권. 수필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문교부(현 교육부) 편수관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체육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수필집 <따로따로 떨어지기><열쇠와 자물쇠>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한시를 읽는 즐거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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