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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잃어버린 동화 / 박문하

by 언덕에서 2010. 12. 23.

 

 

 

잃어버린 동화 

 

                                                               박문하(朴文夏, 1917 ~ 1975)

 

 

 

 가을비가 스산히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이미 밤도 깊었는데 나는 비 속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어느 골목길 한 모퉁이 조그마한 빈 집터 앞에서 화석처럼 혼자 서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오막살이 초가 한 채가 서 있었던 곳이다. 와보지 못한 그 새, 초가는 헐리어져 없어지고, 그 빈 집터 위에는 이제 새로 집을 세우려고 콘크리트의 기초 공사가 되어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 앞에 묵연히 선 듯, 내 마음과 발걸음은 차마 이 빈 집터 앞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웅장미를 자랑하는 로마 시대의 고적도 아니요, 겨레의 피가 통하는 백제, 고구려나 서라벌의 유적도 아닌, 보잘것없는 한 칸 초옥이 헐리운 빈 터전이 이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울리어 주는 것은 비단 비 내리는 가을밤의 감상만은 아닌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에 나는 몹시 마음이 외로울 때나, 술을 마신 밤이면 혼자서 곧잘 이곳을 찾아왔었던 것이다. 밖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통금 시간이 임박해서도 이 초가 앞을 한 번 스쳐가지 않으면 잠이 잘 오지 않는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 이 초가집주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내가 이 초가집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5년 전의 일로서, 그때 나는 국민학교 1학년 생이었다고 생각된다. 내 형제들은 3남 2녀가 되지만 모두가 그때 중국 땅에 망명을 가서 생사를 모르던 때이다.

 홀어머니는 막내아들인 나 혼자만을 데리고 남의 집 삯바느질로 겨우 연명을 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님이 갑자기 병이 들어서 두 달 동안을 병석에 앓아눕게 되었다. 추운 겨울철이었기 때문에 우리 모자는 그야말로 기한에 주리고 떨게 되었었다.

 이웃 사람들이 이 딱한 꼴을 보다 못해서 나를 호떡 파는 곳에다가 취직을 시켜 주었다. 낮에는 주린 배를 움켜잡고서 그래도 학교엘 나가고, 밤에는 호떡 상자를 메고 다니면서 밤늦게까지 호떡을 팔면 겨우 그날의 밥벌이는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나는 호떡 상자를 어깨 위에 메고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맛 좋은 호떡 사이소. 호떡' 하고 외치면서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길가에 있던 조그마한 초가집 들창문이 덜커덩 열리더니 거무스레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호떡 5전 어치만 주가."

 중년 남자는 돈을 쥔 손을 쑥 내밀었다.

 어스름 램프불이 졸고 있는 좁은 방 안에는 나보다 나이 어린 두 오누이가 있었고, 그 옆에는 어머님인 듯한 중년 부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호떡 한 개 값은 1전이고, 5전 어치를 한꺼번에 사면 덤으로 한 개씩 더 끼워서 주던 때였다.

 중년 남자는 호떡 여섯 개를 받아서는 오누이에게 각각 두 개씩을 나누어주고는 나머지 두 개 중에서 한 개를 중년 부인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덜커덩 창문이 닫히고 말았다.

 창문의 닫힌 방 안에서는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 소리와 함께 네 식구들이 호떡 먹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나는 어릴 때 한 번도 이러한 가족적 분위기를 맛본 일이 없었다. 일찍이 유복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또 두 형제간의 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애정 실조증에 걸리어 홀어머님 밑에서 살인적인 가난과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자라난 나에게 이날 밤 초가집의 흐뭇한 가족적 분위기는 나에게 있어서 뼈게 사무치도록 부럽고도 그리운 광경이었다.

 이때부터 나의 머릿속에는 이 초가집 풍경이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의 상징으로서 판이 박혔고, 내 몸과 마음이 외로울 때 가만히 눈을 감으면 호박꽃 같은 램프불이 피어 있는 그 창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 속에서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 소리와 함께 호떡 씹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원이 되고 한이 되어, 내 형제들은 왜놈들 치하에서 모두가 가정을 버리고 놈들의 철창 속에서, 또는 이역 땅 망명의 길에서 숨져갔지마는, 나 혼자만이 비겁하게도 어떻게 하여서라도 집을 지키면서 어머님을 뫼셔 알뜰한 가정을 한 번 가져보고 죽겠다고 오늘날까지 몸부림을 쳐왔던 것이다.

 그 때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이 탁류로 흘러가버린 지금, 나는 초가집보다는 몇 배나 더 큰 '콘크리트' 집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가족들을 거느리게 되었지마는, 어쩐지 아직까지도 그날 밤의 그 초가집 창가의 광경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근년에 사랑하는 큰 자식 놈을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리고, 이따금씩 아내마저 그 거리가 무척 멀어져 가는 밤이면 나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는 곧잘 이 초가집 창가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면 호박꽃 같은 램프의 불이 피어 있는 초가집 창가에서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언제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와 함께 호떡을 씹는 소리가 그 방에서 잔잔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운 내 동화 속의 이 초가집도 헐려 간 데 온 데 없어졌고, 스산한 가을비가 내리는 이 외로운 밤을 나는 혼자서 진정 어디로 가야만 한단 말인가?

 

 


 

 

 박문하(朴文夏. 1917∼1975)  : 수필가ㆍ의사. 호 우하(雨荷). 독립운동가 박차정의 남동생이다.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출생. 독학으로 의학을 수업,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부산 민중병원 원장, 국제팬클럽 한국위원,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 [수필]지 동인, 부산시 문화상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수필집 <배꼽 없는 여인>(1960) <인생 쌍화탕>(1963) <약손>(1965) <씨 뿌리는 사람들>(1968) < 낙서 인생>(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