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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101

작품애 / 이태준 작품애(作品愛) 이태준 (1904 ~ ? ) 어제 경성역으로 부터 신촌 오는 기동차에서다. 책보를 메기도 하고, 끼기도 한 소녀들이 참새 떼가 되어 재잘거리는 틈에서 한 아이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흑흑 느껴 울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우는 동무에게 잠깐씩 눈은 던지면서도 달래려 하지 않고, 무슨 시험이 언제니, 아니니, 내기를 하자느니 하고 저희끼리만 재깔인다. 우는 아이는 기워 입은 적삼 등허리가 그저 들먹거린다. 왜 우느냐고 묻고 싶은데 마침 그 애들 뒤에 앉았던 큰 여학생 하나가 나보다 더 궁금했던지 먼저 물었다. 재재거리던 참새 떼는 딱 그치더니 하나가 대답하기를 "걔 재봉한 걸 잃어 버렸어요." 한다. "학교에 바칠 걸 잃었니?" "아니야요. 바쳐서 잘 했다구 선생님이 칭찬해주신 걸 잃었어요.. 2011. 3. 31.
묵언의 바다 / 곽재구 묵언의 바다 곽재구(1954 ~ ) 저문 시간이라면 순천만에 나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개펄이 좋고 개펄 냄새를 이리저리 싣고 다니는 바람의 흔적이 좋다. 키 넘게 훌쩍 자란 갈대숲, 갈대들의 목은 꺾여져 있다. 모두 같은 방향이다. 바람은 가끔씩 갈대숲 사이로 들어온다. 그럴 때 갈대들은 자신의 내면 안에 숨긴 낡고 오래된 악기의 소리를 낸다. 어디로 갈까……. 고개 숙이고 끝없이 걸어가는 갈대들의 행렬은 순례자의 그것을 닮아 있다. 바람은 순례자의 옷깃을 흔들고, 일찍 도착한 철새 몇 마리가 순례자의 이마 위를 선회한다. 시베리아로부터의 먼 비행을 거친 그들의 날갯짓은 은빛으로 빛난다. 조류학자들이 먹이를 위해 혹은 번식을 위해 새들은 먼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때, 나는 고개를 젓는다. 어.. 2011. 3. 29.
겨울 나무 / 황동규 겨울 나무 황동규 (1938 ~ ) 잎사귀가 크고 화려한 나무들이 겨울 몇 달 동안 옷을 벗고 서 있는 모습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즈음 서울 시내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 되었지만, 어쩌다 덕수궁이나 비원에 들를 때 알맞게 마른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편안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생략할 것을 다 생략한 어떤 엄격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 엄격함에 끌려 박수근 같은 화가는 여름 나무도 겨울나무처럼 그렸을 것이다. 활엽수 가운데서도 느티와 버들의 누드는 마음을 끈다. 빗자루처럼 멋없이 박혀 있는 겨울 포플러나 집념투성이의 가지를 사방으로 내밀고 있는 벚나무의 나체는 우리가 쉽게 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주지 않는다. 가로수이기 때문이겠지만 여기저기 골절상을 입은 플라타너스의 맨몸도 마찬가.. 2011. 3. 24.
젊은 아버지의 추억 / 성석제 젊은 아버지의 추억 성석제 (1960 ~ ) 내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는 늘 중년이다. 아버지는 환갑의 나이에 돌아가셨는데도 지금도 나는 아버지, 하면 반사적으로 중년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중년을 나이로 환산하면 서른 살에서 쉰 살 정도일까. 연부역강. 사나이로서는 알맞은 경륜에 자신감 있는 행동이 조화를 이루는 황금기다. 그렇지만 내가 아버지를 중년으로만 기억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열세 살이 되기 직전의 겨울, 나는 전형적인 사춘기적 증상과 맞부딪쳤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주제 파악 불량에서 기인하는 자존망대형 조발성 천재 증후군'이라 하겠는데, 그 증상은 먼저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일단 그 증상에 관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눠 보기로 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인 이상, 아.. 2011. 3. 22.
명태에 관한 추억 / 목성균 명태에 관한 추억 목성균(1938 ~ 2004)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우리집 부엌 기둥에 명태 한 코가 걸려 있었다. 산골 그을음투성이의 초가집 부엌 기둥에 한 코로 걸린, 다소곳한 명태 한 쌍의 모습은 '천생연분'이란 제목을 달고 싶은 한 폭의 정물화였다. 밤이 이슥해서 취기가 도도해진 아버지가 명태 한 코를 들고 와서 마중하는 며느리에게 "옛다"하며 건네주시는 걸 본 적이 있다. 남용하시는 게 아닌가 싶은 아버지의 호기가 참 보기 좋았다. 그날, "아버님, 저녁 진짓상 차릴까요?" 며느리가 묻자 아버지는 "먹었다" 하시며 두루마기를 벗어서 며느리에게 건네주고 사랑으로 들어가셨다. 며느리는 두루마기 자락을 추녀 밑에 걸어 놓은 등불에 비춰 보더니 즉시 우물로 가지고 가서 빨았다. 아버지는 취한 걸음으로.. 2011. 3. 17.
선비정신 / 송건호 선비정신 송건호(1927 ~ 2001) 기사도(騎士道) 무사도(武士道) 선비 예찬론이 심심찮게 저널리즘의 화제가 되고 있다. 아다시피 선비는 이조 5백 년간 양반들의 이상적 지식인상으로서 중세 유럽의 기사도나 일본의 무사도처럼 지난날의 이상상이지 지금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인간상은 못 된다. 원래 이상적 인간상이란 나라나 시대마다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르며 선비가 우리 사회의 이상이 된 것은 그 때 양반 신분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유럽에 기사도가 있고 일본에 무사도가 생긴 것도 제각기 중세의 봉건제가 그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필요로 한 인간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시민 사회에서 이런 인간상이 필요 없게 된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한데 근래 '선비론'이 새삼.. 2011. 3. 10.
수학이 모르는 지혜 / 김형석 수학이 모르는 지혜 김형석(1920~ ) 재미있는 우화가 있다. 옛날 아리비아의 어떤 상인이 임종을 맞게 되었다. 그는 자기 앞에 세 아들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들에게 남겨 줄 유산이라고는 말 열일곱 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고장의 습관에 따라 꼭 같이 나누어 줄 수는 없으니까 맏아들 너는 열일곱 마리의 반을, 둘째 아들 너는 3분의 1을, 그리고 막내아들 너는 전체의 9분의 1을 갖도록 하라." 고 유언을 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재산을 나누어 가져야 할 삼 형제간에는 오랜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해결을 얻을 길이 없었다. 맏아들은 열일곱의 반으로 아홉 마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동생들은 아홉 마리는 2분의 1이 넘으니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덟 마리 반이 되지만 반.. 2011. 3. 3.
조화 / 박경리 조화(調和) 박경리(1926 ~ 2008) 무슨 빛깔을 좋아하느냐, 어떤 꽃을 사랑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얼핏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이 어느 계절이 인상적이냐고 한 대도 역시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할 것이며 종내는 잘 모르겠노라는 대답이 될 성싶다. 사람의 경우만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떤 성격이 매력적이며 어떠한 얼굴에 흥미를 느끼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 인간들 앞에서 창문을 닫아 버리고 내 마음이 황무지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떠한 하나하나를 추려 내어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하며 서둘러 보기에는 좀 나이 들어 버린 것 같기는 하다. 무릇 어떤 꽃이든 빛깔이든 혹은 계절이든 간에 어느 조화를 이룬 속에서만이 참된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그러한 조화는 명확하.. 2011. 3. 1.
선생님의 밥그릇 / 이청준 선생님의 밥그릇 이청준(1939 ~ 2008) 37년 전의 반 담임 선생님을 모신 저녁 회식 자리는 이 날의 주빈이신 노진 선생님의 옛 기벽에 대한 추억으로 처음엔 그 분위기가 그저 유쾌하기만 하였다. 노진 선생님은 그러니까 50년대 초중반 전란의 혼란과 궁핍 속에 어렵사리 중학생모를 쓰게 된 우리 중학교의 1학년 3반 담임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중학교 초년 시절 그 남녘 도시의 노진 선생님은, 새 교풍과 학과목, 근엄한 표정의 선생님들 앞에 어딘지 기가 조금씩 움츠러든 반 아이들, 특히 이곳저곳 벽지 시골에서 올라와 낯선 도회살이를 갓 시작한 심약한 지방 출신 아이들을 또래 친구처럼 즐겁게 잘 보살펴 주신 분이었다. 한 예로, 방과 후에 뒤에 남아 빈 교실을 정리해야 하는 청소 당번을 몹시 싫어한 우리.. 2011. 2. 24.
백리금파(百里金波)에서 / 김상용 백리금파(百里金波)에서 김상용(1902~ 1952) 고개를 넘어, 산허리를 돌아 내렸다. 산 밑이 바로 들, 들은 그저 논뿐의 연속이다. 두렁풀을 말끔히 깎았다. 논배미마다 수북수북 담긴 벼가 연하여 백리금파를 이루었다. 여기저기 논들을 돌아다니는 더벅머리 떼가 있다. '우여, 우여' 소리를 친다. 혹 '꽝꽝' 석유통을 두드리기도 한다. 참새들을 쫓는 것이다. 참새들은 자리를 못 붙여 한다. 우선 내 옆에 있는 더벅머리 떼가 '우여' 소리를 쳤다. 참새 떼가 와르르 날아갔다. 천 마리는 될 것 같다. 날아간 참새들은 원을 그리며 저편 논배미에 앉아 본다. 저편 애놈들은 날아 앉은 새 떼를 보았다. 깨어져라 하고 석유통을 두들긴다. 일제히, "우여!" 소리를 친다. 이 아우성을 질타할 만한 담력(膽力)이 .. 2011. 2. 22.
겨울밤의 얘기 / 노천명 겨울밤의 얘기 노천명 (1912 ~ 1957) "좋아하는 눈 왔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할멈이 내 창 앞에 와서 이렇게 지껄이는 소리에 얼른 덧문을 열고 내다보니 눈보라가 날리고 있어 내가 또 싱겁게 좋아했더니 저녁부터 날씨는 갑자기 쌀쌀해지고 말았다. 방이 외풍이 세서 어제 오늘로 부쩍 병풍이 생각나고 방장 만들 궁리를 한다. 시골집의 어머니가 쓰시던 낡은 병풍을 가져올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그 병풍을 치고 내가 홍역을 할 때 밤을 꼬빡 새시며 얼굴에 손이 못 올라가게 지키셨다고 들었다. 지금 그것을 내 방에다 가져다 치고 보면 내 생각은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던 우리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불타산 뾰죽한 멧부리들이 둥글게 묻히도록 눈이 와 쌓일라치면 아버지는 친구들과 곧잘 노루 사냥을.. 2011. 2. 17.
두부만필(豆腐漫筆) 두부만필(豆腐漫筆) 홍사용(洪思容, 1900∼1947) 간 밤에 봉창을 두드리던 빗소리는 봄을 재촉하는 소리려니. 아침에 외치는 장사치의 소리에도 어느덧 봄빛이 짙었다. "엊저녁 남은 밥이 있어서 오늘 아침은 그대로 먹겠는데 온 더운 반찬이라군 아무것도 없으니 어떡하나." 하는 빈처(貧妻)의 을시년스러운 탄식에, "무어 걱정할 것 있소. 오 전(五錢)이 있으면 두부를 사고 일 전만 있거든 비지나 사구려." 멋없는 남편의 배포 유(柔)한 소리이다. "그나마 돈인들 어디 있어야지요." "아따 그럼 외상으로 얻지.“ "그럼 두부나 한채 받을까?" "외상이면 소두 잡아먹는다구 …… 이왕이면 두부나 비지나다-사구려." 어떤 선납(禪納)은 두부를 '보살' 로까지 봉찬(奉讚)하기도 하였다. '보살' 이라는 것은 범어.. 2011.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