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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붉은 추억 / 정겸

by 언덕에서 2011. 8. 29.

 

 

 

붉은 추억

 

                          정 겸 (1957 ~ )

 

경기도청 신관 앞 유토피아 정원

배롱나무는 입고 있던 꽃무늬 블라우스의 앞단추를 서둘러 풀어내고 있다

쏟아지는 붉은 웃음들

잘 익은 바람이 꽃술 살며시 만지고 간다

꽃잎과 꽃잎 사이를 비집고 힐긋 고개를 내민 도정 홍보판

‘동탄에서 강남까지 18분, GTX* ’

날씬한 기차가 시간을 조각내며 힘차게 달리고 있다

 

그녀가 배롱나무 아래서 비스듬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물방울무늬 원피스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간지러움에 배롱나무 덩달아 흔들거린다

사진 한방 찍는 사이, 서 있던 배롱나무

그녀를 와락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아니, 세상에나 벌건 대낮에 저렇게 진한 포옹을 하다니”

그녀의 가슴마다 꽃잎자국 선명하다

 

꽃잎에 입을 맞춘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백일홍 꽃잎 정말 맛이 있다고 이렇게 달콤한 입맞춤은 처음이라고”

그녀는 나에게 백일간의 외도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

나는 대답 대신 목백일홍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녀가 배롱나무라 했다

나는 목소리를 돋워 간지럼나무라 했다

나무와 나무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내가 빙고게임을 하는 사이 시간의 틈새는 멀어져갔다

이내 나의 여름은 갔다

 

 

*경기도가 제안한 수도권광역급행철도

 

 

 


 

기나긴 여름이 드디어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한낮의 온도도 불볕같은 모습은 사라져서 비교적 쾌적하네요. 햇살이 좀더 내리쫴야 곡식이 제대로 익을 거라는 어느 분의 말씀대로 며칠만 더 햇살이 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위의 시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을 의인화하여 그려놓은 품새가 김광균의 서정시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좀 있으면 추석도 다가오겠군요. 해마다 여름이 지나가는 8월말이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 지금 흘러나오는 ‘나뭇잎 사이로’와 패티김이 불렀던 ‘9월이 오는 소리’가 그것입니다. ‘9월이 오는 소리’의 가사 중에 “꽃잎이 피는 소리 / 꽃잎이 지는 소리” 이 부분이 가장 좋았어요. 아, 물론 조동진이 불렀던 ‘나뭇잎 사이로’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요.

 이런 상상에다 음악까지 튼다면 그런 하루는 꽤나 운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 가수인 빌리 조엘은 “나는 음악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인간애의 폭발적인 표현이다. 음악은 우리 모두 감동받는 어떤 것이다. 어떤 문화 속에 살든지 누구나 음악을 사랑한다." 는 말을 했지요.

 언젠가 운전 중 라디오를 듣는데 진행하는 MC가 “노래가 없었어도 사람들이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지요.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창밖의 가을바람이나 행인의 걸음걸이도 음악이라 생각하니 변하는 계절이 달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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