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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가을 전어 / 정일근

by 언덕에서 2011. 10. 3.

 

 

 

 

 

 

 

 

 

가을 전어 

 

                                      정일근 (1958 ~  )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전어나 듬뿍 썰어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달라 하자

바다는 떼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을을 어찌하지 못해 속살 불그스레 익어

제 몸속 가득 서 말의 깨를 담고 찾아올 것이니

조선 콩 된장에 푹 찍어 가을 바다를 즐기자

제철을 아는 것들만이 아름다운 맛이 되고 약이 되느니

가을 햇살에 뭍에서는 대추가 달게 익어 약이 되고

바다에서는 전어가 고소하게 익어 맛이 된다

사람의 몸속에서도 가을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법이니

그 빈자리에 가을 전어의 탄력있는 속살을 채우자

맑은 소주 몇 잔으로 우리의 저녁은 도도해질 수 있으니

밤이 깊어지면 연탄 피워 석쇠 발갛게 달구어 전어를 굽자

생소금 뿌리며 구수한 가을 바다를 통째로 굽자

한반도 남쪽 바다에 앉아 우리나라 가을 전어 굽는 내음을

아시아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즐겁게 피워 올리자


- 2004년도 제18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촘촘하게 손질해서 쪄 말린 감잎 오가피잎 뽕잎 당귀잎……. 모두 가을을 닮은 색이군요. 곱게 보내신 님의 정성을 읽자니 황송합니다. 쌀쌀해지면 더욱 손이 많이 가겠습니다. 병 하나는 가까운 인연들과 함께하겠습니다. 다른 한 병은 어찌할까 생각 중입니다.


 사람들 스치고 만날 때마다, 친구 되려는 노력보다 친구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친구라 하기를 버팅기는 일.

 나는 우정의 1번지를 채워본 적이 없습니다만, 한 10년 지나서 만날 이에게 이 귀한 차를 내보고도 싶습니다. 그때쯤이면 아마 군내가 날 겁니다. 친구가 이건 차맛도 아니라고 뭐 이런 걸 먹냐고 퉤!퉤! 뱉어버리면 너 주려고 기다렸단 말도 못하고,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평생을 비워두고 싶은 자리이니, 차라리 산속 깊이 들어가 잎 떨어지고 눈 내리고 하는 동안 혼자 뜨겁게 두 병 다 먹어치우는 게 낫겠다 싶습니다.


 그래요, 언제 남도 자락 가서 전어 자십시다. 그 철 놓치면 비진도나 갈까요. 아이고 궁상스럽네요.

 

 

 

 

*유성용 저 <생활여행자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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