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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101

30년 전의 그날 / 강원룡 30년 전의 그날 강원룡(1917 ~ 2006) 20대 젊은 시절의 얘기이다. 나는 임신 중인 아내와 함께 고아들을 돌보며 생활을 꾸러 가고 있었다. 그 때, 아내는 고아원의 차디찬 냉돌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다. 그리고 고아들이 먹고 연명하는 대두박을 끓여 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나는, 한 젊은 종교인으로서 품었던 이상이 하나의 천박한 감상주의가 아니었는지를 심각하게 반성하고, 좀 더 쉽게 인생을 사는 길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날 뜻밖에, 사복 입은 형사가 뛰어들어 집 수색을 하고, 나를 강제로 연행하여 경찰서 감방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었다. 어두운 감방 안에는 뼈만 앙상하여 몰골이 말이 아닌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들은 내게 손을 내밀며 담배를 달라고 했으나,.. 2011. 7. 12.
7월의 바다 / 심훈 7월의 바다 심훈(1901 ~ 1936) 흰 구름이 벽공에다 만물상을 초 잡는 그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맥파만경에 굼실거리는 청청한 들판을 내려다보아도 백주의 우울을 참기 어려운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조그만 범선 한 척을 바다 위에 띄웠다. 붉은 돛을 달고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는 노도 젓지 않고 키도 잡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맡겨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서 부유와 같은 인생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까닭 모르고 살아가는 내 몸에는 조만간 닥쳐올 죽음의 허무를 미리 다가 탄식하였다. 서녘 하늘로부터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몰려 들어온다. 그 검은 구름장은 시름없이 떨어뜨린 내 머리 위를 덮어 누르려 한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 2011. 7. 5.
간도의 봄 / 강경애 간도의 봄 강경애 (1907 ~ 1943) 간도라면 듣기만 하여도 흰 눈이 산같이 쌓이고 백곰들이 떼를 지어 춤추는 환원한 광야로만 생각될 것이다. 더구나 이런 봄날에도 꽃조차 필 수 없는 그런 재미꼴 없는… 사실에 있어 시력이 못 자랄 만큼 광야는 넓다. 그리고 꽃 필 새 없이 봄은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 대신 무연히 넓은 광야니 만큼 이 봄날이 오면 황진(黃塵)이 눈뜨기 어렵게 휘날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간도의 그 봄… 내 눈 속에 티끌만 넣어주던 그 봄을 잊을 수가 없다. 진달래꽃, 개나리꽃 속에서 봄맞이를 하는 나임에 한 원인도 되겠지마는 무엇보다도 그 봄에 안긴 인간 생존이 너무나 봄답지 못한 살풍경을 이룬 때문에 한층 더하였다. 어떤 날 나는 빨래를 할 양으로 해란강으로 향하였다. 간도의 명.. 2011. 6. 30.
은근과 끈기 / 조윤제 은근과 끈기 조윤제(1904 ~ 1976) 한국 문학과 한국 사람 생활의 특질(特質)이란 어떤 것인가? 오랜 역사의 전통에서 살아 온 한국 사람의 생활에 특질이 없을 리 없고, 또 그를 표현한 한국 문학에 특질이 없을 수 없다. 한국 예술(藝術)을 흔히들 선(線)의 예술이라 하는데, 기와집 추녀 끝을 보나, 버선의 콧 등을 보나, 분명히 선으로 이루어진 극치(極致)다. 또, 미인(美人)을 그려서 한 말에 '반달 같은 미인'이란 말이 있으니, 이도 또한 선과 선의 묘미(妙味)일 뿐 아니라, 장구 소리가 가늘게 또 길게 끄는 것도 일종의 선의 예술일 시 분명하다. 그런데, 반달은 아직 충만(充滿)하지 않은 데 여백이 있고, 장구 소리에는 여운(餘韻)이 있다. 이 여백과 여운은 그 본체(本體)의 미완성(未完成.. 2011. 6. 23.
풍란(風蘭) / 이병기 풍란(風蘭) 이병기(1891 ~ 1968) 나는 난(蘭)을 기른 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분(盆)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집이라고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기도 하였다. 화초 가운데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 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 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건,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 줄 줄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랭(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전 서울 계동(桂洞) 홍술햇골에서 살 때.. 2011. 6. 21.
아리랑과 정선 / 김병종 아리랑과 정선 김병종 (1953 ~ ) (정선 아리랑의 탯줄 아우라지 가는 길. 기차는 간이역 '여량(餘糧)'에 선다. 도회지로 가는 딸을 배웅 나온 듯한 어머니가 서 있다. 어여 그만 들어가시라고, 딸은 몇 번씩이나 손짓을 보내건만 어머니는 개찰구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그러다가 기어이 옷고름을 눈으로 가져간다. 증산(甑山)을 떠난 기차가 잠시 머물렀던 또 다른 간이역은 그 이름이 별어곡(別於谷). 얼마나 이런 이별이 있어 왔기에 역 이름마저 '이별의 골짜기'였을까〔별어곡은 '자라 별(鼈)'자로 표기하기도 한다〕. 나를 내려놓은 두 량(輛)짜리 기차는 제법 벌판을 흔들며 떠나가고, 떠나간 자리 따라 억새풀이 일렁인다. 포플러 숲 건너편으로 반짝 물길의 한 자락이 보인다. 역 앞 청원 식당에서 '콧등치기.. 2011. 6. 16.
깨어진 그릇 / 이항녕 깨어진 그릇 이항녕 (1915~ 2008) 광복 전에, 나는 경남에서 군수 노릇을 한 일이 있다. 광복이 되자 나는 그것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소나마 속죄가 될까 하여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이 전비에 대한 속죄가 되는지에 관해선 지금도 의심을 가지고 있다. 교육은 가장 신성한 사업이다. 그런 사업에 죄 있는 사람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금, 내가 속죄를 한답시고 교육계에 들어온 것이 교육에 대한 모독이 아니었나 하고 반성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속죄의 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국민학교 평교사 되기를 바랐다. 기왕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이상, 가장 기초가 되는 일부터 하고자 함이었다. 그.. 2011. 6. 14.
무엇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가 / 김용택 무엇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가 김용택(1948 ~ ) 아이들이 다 돌아간 운동장은 적막하다. 텅 빈 운동장에는 햇살들이 정직하게 내리쪼이고 한 쪽은 벌써 산그늘이 내렸다. 아, 저 적막한 산그늘, 운동장 끝에 걸린 호수의 물이 깊어졌다. 농사철이라 물을 배고 있는 모양이다. 운동장 가의 언덕에는 진 보라색 꿀풀꽃들이 한창 피어난다. 꽃송이를 쏙 뽑아서 꽃끝을 쪽 빨면 꿀같이 단물이 나온 데서 이 풀꽃 이름은 꿀풀꽃이다. 산그늘에 덮인 꿀풀꽃은 참으로 서늘하다. 꿀풀꽃뿐이 아니다. 산그늘에 덮인 토끼풀꽃은 얼마나 깨끗하게 희고, 늦게 핀 씀바귀꽃은 얼마나 샛노랗게 그 자태가 아련한가. 이렇게 산그늘이 내린 운동장을 나는 어슬렁거린다. 학교 뒷밭에 언제 심었는지 옥수수가 나박나박 자라서 제법 잎이 휘어졌다... 2011. 6. 9.
노출 / 김훈 노출 김훈 (1948 ~ ) 몸을 드러낸 여자들은 도시의 여름을 긴장시킨다. 탱크톱에 핫팬츠로, 강렬하게 몸매를 드러낸 여자가 저 쪽에서 걸어올 때, 더위에 늘어진 거리는 문득 성적 활기를 회복한다. 노출이 대담한 여름 여자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그 여자의 옷을 보고 있는지 몸을 보고 있는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그 혼란은 온갖 정의로운 담론들이 아우성치는 이 황폐한 도시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나의, 그나마 즐거움이다. 진보적 자유나 보수적 진실을 절규하는 신문 칼럼을 읽을 때가 아니라, 노출이 대담한 젊은 여자가 그의 젊은 애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이 나라의 미래에 안도감을 느낀다. 여름 여자들의 그 손바닥만한 탱크톱과 핫팬티, 그리고 그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 사이에.. 2011. 6. 7.
포플라나무 예찬 / 김교신 포플라나무 예찬 김교신(金敎臣: 1901 ~ 1945) (其 一) 낙락장송의 우거진 경개가 장하지 아님이 아니다.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때 독야청청(獨也靑靑)할 만한 의열(義烈)의 사(士가) 아님을 어찌하며, 운표(雲表)에 우뚝 솟은 은행의 거수(巨樹)가 위관(偉觀)이 아님이 아니나, 인의에 기반을 세운 공부자(孔夫子)에게 경원하는 생각이 앞섬을 어찌하며, 매죽(梅竹)이 귀엽지 아님이 아니나 시인 묵객의 취흥을 손할까. 저어하니 차라리 우리는 계변(溪邊)에 반열(班列) 지으며 혹은 고성(古城)에 외로이 솟은 포플라나무를 우러러보고자 하노라. 포플라는 하늘을 향하고 산다. 인간(人間) 살림에 세력 투쟁(勢力鬪爭)이 있고 국가(國家) 생활에 영토 확장(領土擴張)의 야망(野望)이 없을 수 없는 것처럼 무릇.. 2011. 5. 31.
나비 이야기 / 서정범 나비 이야기 서정범 (1926 ~ 2009) 옛날에 한 나이 어린 아가씨가 흰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흰 가마는 신랑이 죽고 없을 때 타는 가마다. 약혼을 한 후 결혼식을 올리기 전 신랑이 죽은 것이다. 과부살이를 하러 흰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이다. 시집에 가서는 보지도 못한 남편의 무덤에 가서 밤낮으로 흐느껴 울었다. 그래야만 열녀가 된다. 아씨가 흐느껴 울고 있는 밤중에 신기하게 무덤이 갈라지더니 아씨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친정에서 함께 따라온 하녀가 이 광경을 보고 달려가 아씨의 저고리 옷섶을 잡고 늘어졌다. 옷섶이 세모꼴로 찢어지며 아씨는 무덤 속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이윽고 갈라진 무덤이 합쳐졌다. 아씨를 잃은 하녀의 손에는 세모꼴 찢어진 저고리 섶만이 남았다. 그런데 신기하게.. 2011. 5. 24.
보리 / 한흑구 보리 한흑구 (1909 ~ 1979)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다. 차가움이 엉긴 흙덩이들을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고, 이제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 2011. 5. 19.